▲ 남한산성 일주개념도
개요 .
⊙ 남한산성 도립공원은 - 광주시 ,하남시 , 성남시에 걸처있으며 총면적은 36.4 KM2 . 성의면적은 598.195 M2 입니다 .
축성의 역사는 백제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국방의 보루로서 그역활을 유감없이 발휘한 역사의 현장입니다 .
⊙ 해발500 M 가 넘는 험준한 자연지형을 따라 , 성의둘레 11.7 K (본성 9 K , 외성 2.7 K) 에 달하는 석성입니다 . 성에는 4대문 (서문 우익문 , 북문 전승문 ,동문 좌익문 , 대문격인남문 지화문 ,) 이 있으며 ,
5 개의 옹성 (제1,2,3, 3개의 남옹성과 연주봉옹성 , 장경사 신지옹성 ) 과 ,
7 개의 옹치 로는. 가장규모가 큰 남장대옹치 , 형식적인 치의형태만 가춘 제1 ,3 남옹치, 연주봉옹성옹치 , 북장대옹치 , 5개는 본성에 있으며 , 외성에는 봉암성옹성 옹치(제15암문옆에 한봉을 향한 포대2기가 있고 포대북쪽에 설치) , 한봉성옹치(아직도 현장에 가보면 옹치의 형체가 있음) 가 있습니다 .
⊙ 16 개의 암문은 , 1 장경사 암문 , 2 장경사신지옹성 암문 , 3 동장대 암문 , 4 북 암문 , 5 연주봉 암문 6 암문 , 7 제1남옹성 암문 , 8 제2남옹성 암문 , 9 제3남옹성 암문 , 10 암문 ,11 동문 암문 , 과 외성에 있는 12 봉암성 암문 , 13 벌봉 암문 , 14 외동장대 암문 , 15 챙성암문 , 16 한봉성 암문 이 자연경관과 함께 설치되여 있음을 봅니다 .
⊙ 외성으로는 - 본성과 연계되여 있는 봉암성 과 한봉성이 있으며 별도로 약간 떨어저 있는 신남성 (성남 검단산)이 있습니다 .
⊙ 또한 , 성내에는 200여개의 문화재가 산재해 있어 자연생태환경과 더불어 역사와 설화가 살아있는 탐방로를 구성하고 있으며 , 민족 자존의 역사와 문화가 숨 쉬는 인고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 아울러 호국불교의 기록도 볼수 있는 곳입니다 .
⊙ 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추진하기 위하여 2009년부터 다양한 연구조사 활동을 수행하고 있으며 , 그 결과 2010년 1월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신청이 되였읍니다 .
▲ * 마천역 가는길 = 5호선 전철 마천행 종점에서 - 1번출구로 나와서 - 119소방서옆 대로따라 오름길 로 직진합니다 .
마천전철역에서 약 500 M 거리에 있는 - 만남의광장 (느티나무 삼거리,버스종점 ) 에 도착합니다 .
산행은 여기서부터 시작합니다 .
남한산성 일주산행은 - 우선 본 산성에 접근하여야 합니다 .
본산성 접근방법은 - 남한산성 도립공원 안내도에(만남의광장 우측에) 1 - 10코스가 소개되여
있으 며 . 다음과 같습니다 .
▲본산성 접근로 - 참고합니다.(여기서 정상이라함은 봉암성에 있는 벌봉 정상(535 .515)을 말 합니다 .)
제1등산로(6.4 K ) = 현위치 1.9 K 산성암 . 1.5 K 연주봉옹성( ▣본성접근) . 0.8 K 북문 . 1.5 K 동장대지 . 0.7 K 정상(봉암성)
제2등산로(5.3 K ) = 성남 산성유원지 0.8 K 산성약수 . 0.8 K 남문( ▣본성접근) . 1.5 K 동문 . 1.5 K 동장대지 . 0.7 K 정상.
제3등산로(7.6 K ) = 사기막골 입구 1.1 K 검단산정상 . 1.2 K 피크닉숲 . 3.1 K 동문( ▣본성접근) . 1.5 K동장대지 . 9.7 K 정상 .
제4등산로(8.2 K ) = 이배재고개입구 1.5 K 망덕산(왕기봉). 1.3 K 검단산정상 . 3.1 K 동문( ▣본성접근) . 1.5 K 동장대지 . 0.7 K 정상.
제5등산로(10.9 K) =목현동 입구 1.5 K 모개미고개 . 4.1 K 검단산정상 . 3.1 K 동문( ▣본성접근) . 1.5 K 동장대지 . 0.7 K 정상.
제6등산로(13.7 K ) = 송정동입구 2.8 K 새우개고개 . 1.5 K 모개미고개 . 4.1 K 검단산정상 . ( ▣본성접근)4.6 K 동장대지 . 0.7 K 정상.
제7등산로(5.4 K ) = 중부면입구 . 1.3 K 약사산정상 . 1.4 K 약수산정상 . 1.8 K 한봉정상 . 0.9 K 정상.
제8등산로(4.3 K ) = 은고개입구 0.9 K 쉼터 . 3.4 K 정상 .
제9등산로(5.7 K ) =천현동입구 1.2 K 송림 . 0.8 K 객산정상 . 1.9 K 안부사거리 . 1.6 K 전망바위 . 1 K 정상.
제10등산로(7.7 K) =광암동 입구 2.5 k 쉼터 . 1.8 K 삼거리 . 0.4 K 연주봉정상( ▣본성접근) . 3 K 정상
* 참고 자료입니다 .
▣ 우선 = 마천동 만남의 장소에서 본성에접근하는방법은 1 코스에 해당되며 , 1 코스에서 서문 또는 수어장대 오르는 코스를 세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 1번코스 = 만남의광장 - 성불사 - 산성암 - 연주봉옹성 - 서문 (우익문 )
* 2번코스 = 만남의광장 - 호국사자사 - 화장실에서 계곡으로 진입 - 헬기장 - 전망대 - 서문 (우익문 )
* 3번코스 = 만남의광장 - 호국사자사 - 화장실에서 우측능선으로 진입 - 서낭당 - 서문 (우익문 )
* 4번코스 = 만남의광장 - 호국사자사 - 화장실에서 우측능선으로 - 유일천 - 일장천 - 청량산 - 수어장대암문 - 수어장대
* 5번코스 = 만남의광장 - 호국사자사 - 화장실에서 우측능선으로 - 일장천 - 남한천 - 청량산 수어장대암문 - 수어장대
*만남의광장에서 서문까지- 1,2,3 번 코스는 약 2 K 로 계산하며 40 - 50분 소요됩니다 .
현위치에서 서문 또는 수어장대로 오르는 - 나의 매일산행코스는 발길 가는대로 갑니다만 -
오늘은 1번코스로 오름을 시작하여 3 번코스 로 하산하기로 합니다 .
▲ 마천동에서 오르는 1 - 5 번코스중 1 번코스로 올라 갑니다 .
오늘은 , 장거리 산행속도 70- 75 % 보다는 약간빠른 75 % 산행입니다 .
▲ 학암천 사거리 . 1번코스는 직진합니다 .
하산시 3번코스는 우측 학암천 따라 내려 옵니다 .
▲ 남한산 성불사를 지나 -
성불사 뒷마당에 있는 부처님 와불도 보며 ,,,,, .
▲ 잠시 오르면 , 좌측으로 배드민턴장을 끼고 직진으로 오릅니다 .
▲ 체육시설도 지나고 소능선을 만나 - 계속 능선길로 진행합니다 .
▲ 첫번째 차돌배기 쉼터에 있는 거리표 . 신뢰할수 없어 참고만 합니다 .
▲ 두번째 소나무 쉼터에 있는 거리표. 참고만 합니다 .
▲ 세번째 암봉쉼터 . 조망이 좋은 쉼터입니다 .
▲ 삼거리 거리표시. 잠시후 산불감시초소를 지나 ,,,,,
▲ 바람골 쉼터 입니다 . 여름철 항상 쉬원한 바람이 부는" 바람골" 입니다 .
바람골을 지나 잠시오르면 , 연주봉옹성 을 좌측으로 끼고 성밖길을 따라가면 전망대를 만납니다 .
▲ 성의 서쪽과 북쪽의 모서리에 위치한 전망대는 포대경 2기가 무료로 설치되여 있으며 ,
산성에서는 제일조망이 좋은곳입니다 .
한때는 활공장으로도 이용된적이 있는 이곳에서는 , 좌로부터 광교산 , 청계산 , 관악산 , 남산 ,
북한산 , 도봉산 , 수락산 , 불암산등 안쪽에 있는 모든산과 서울시가지는 물론 , 예봉산 과 검단산
일부도 조망됩니다 . 전망대 뒤 성에서는 검단산도 잘 보입니다 .
▲ 조망을 생각하며 낮시간에 통과하지만 , 저기압과 까스로 조망은 별로입니다 . 아쉽습니다 .
일자산 과 공수부대 장지동 일대입니다 .광교산 , 청계산 , 인능산 구룡산 등은 안개속에 숨어 있습니다 .
▲ 송파구 일대만 보입니다 .
▲ 아차산성 만 보입니다 .
▲ 방금 올라온 능선길입니다 .
▲서문(우익문) 본성에 접근하였습니다 . 서문은 산성의 서북쪽 모서리 부분의 해발450 M 지점에
위치합니다 .
4 대문중 제일작은 서문은 개구부 와 문루로 구성되였으며 , 개구부는 내외문이 반원형의 홍예식입니다 .
서쪽면은 경사가 급해 물자를 수송하기는 어려우나 - 광나루,송파나루 방면에서 산성으로 진입하는 가장빠른 길목으로 - 산성초기부터 있엇던것으로 보이는데 정조 3 년개축하며 수어장대 우측에 있어 우익문이라 칭합니다 .
▣ 오늘은 서문에서부터 - 산성일주를 합니다 .
성의 둘레는 본성9 K , 외성2.7 K 이며 , 본성을 일주하는 거리의 기록에는 7.1 K 로 되여 있으나 - 나는 통상 8 k로 기록합니다 .
구간별 거리는 , ▣ 서문 - 수어장대- 남문 = 1.7 K + 0.2 K =1,9 K ▣ 남문 - 동문 = 1.7 K
▣ 동문 - 동장대터 = 1.1 K ▣동장대터 - 북문 = 1.6 K ▣ 북문 - 서문=1.1 K
▣ 산성일주방법에 따른 거리 추가 0.6 K = 계 약8 K .
* 산행방법에 따라 거리는 차이가 납니다 .
* 산성일주 소요시간은 : 보통의 속도 2 시간 .
나의 산성일주 방법은 1, 성벽에서 1 M 떨어지며 5 M 를 벗어나지 아니합니다 . (몇군대의 부득이한
지점이 있음)
2, 우회로는 이용하지 아니합니다.
3, 가끔은 옹성과 옹치를 탐방 합니다 .
성벽을 따라 좌우 - 원하는 방향으로 진행합니다 . (100 M 아래에 있는 국청사 앞에 식수가 있읍니다 . )
어제는 좌로 갔으니 오늘은 우로 갑니다 . 수어장대 방향입니다 .
▲ 서문바로위에 있는 소나무 쉼터입니다 . 매일산행시 30분 - 1시간 몸풀기 운동을하는 곳입니다 .
20 m 위에 화장실도 있습니다 .
남한산성은 소나무 식생 비율이 약20% 정도 됩니다 . 또한 잘보존되였고 수십년된 거목이 많이 분포합니다 . 서울근교에서는 드물게보는 소나무 숲입니다 . 이쪽방향으로 소나무숲은 남문까지 이어집니다 .
산성과 문화재와 함께 잘 보존하여 후손에게 물려주어야하는 보물입니다 .
▲ 성따라 가다보면 좌측계단위에 있는 병암남성 신수비입니다 .
선조들의 건축실명제의 한단면이라 할수있는 금석문입니다 .
내용은 , 정조3년 (1779)6월18일까지 약50여일간에 대대적인 보수내용을 기록합니다 .
산성을 증개축하는데 돈 1만냥과 쌀900석의 재정을 투입하여 , 당시 감독관인 광주부윤 이명중의 지휘아래 벽돌 석회등을 구어 운반하는 관리자와 , 보수영역을 18구역으로 나누어 담당한 18 패장의 이름 등이 기록되여 있읍니다 . 두개의 큰 돌로 되여있고 "병암"이라는 글자가 선명히 남아 있읍니다 .
*마모되고 떨어저나간 부분도 있지만 자세히보면 선명한 금석문을 볼수 있읍니다 .
▲ 서문에서 약500 M 지점에 있는 화장실.
▲ 수어장대 입구에있는 거리안내표.
(남문,지화문 1.1 K ) (서문 ,우익문0.6 K . 북문,전승문1.7 K ) (종로 1.2 K 성안 중심부)
남한산성 사적 제57호.
입구에서 약100 M 위에 수어장대가 있습니다 .
▲ 수어장대 입구에 있는 남한산성 해설문 .
▲ 수어장대 . 지휘와 관측을 위한 군사적 목적으로 지은 누각입니다 .
남한산성에 있는 5개의장대중 (남장대, 동장대 , 북장대 , 서장대 , 수어장대)유일하게 남아있는 가장화려하고 웅장한 건물입니다 .
인조2년 단층으로 서장대라 불리던것을 , 영조27년 2층으로 다시짓고 수어장대라는 편액을 달았습니다 .
성의 핵심적인 위치에 있으며 유사시 행궁이 있는 임금을 수호하는 장대입니다 .
수어장대 2층내부에는 "무망루"라는 편액이 있는데 , 병자호란때 인조가 격은 시련과 8년간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귀국하여 , 북벌을 이루지 못하고 승하한 효종의 원한을 잊지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지은것입니다 .
현재 "무망루" 편액은 수어장대 오른쪽에 보호각을 지어 , 많은사람들이 볼수 있도록 보관하고 있읍니다 .
▲ 우측 모서리에 매바위가 있고 , 중앙 향나무뒤에 "무망루"보호각이 있습니다 .
⊙ 수어장대 서쪽에 , 구소삼각점(舊小三角點)이 있습니다 .
탁지부 측량 소삼각점(度支部 測量 小三角點)은 대한제국 말기(1908 - 1910년초) 탁지부에서
전국 최초로 경기도와 경상북도 일부 지역에 , 지적 세부측량 의 기준이 되는 三角點을 설치
하였습니다 .
그후 일제가 한반도에 설치한 三角點과 구별하기 위하여 , 구소삼각점(舊小三角點) 장대(將坮)라고 하며 , 삼각점 으로는 최초로 향토문화유산 기념물 제7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습니다 .
머리부분에 " + "자가 새겨져있고 모서리에는 " 탁지부"라고 음각되여 있습니다 .
소재 :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815 - 1(수어장대 서쪽 단위에 설치되여 있음)
위도 : 37도 20'37"445
경도 : 127도 10'32"180
해발고도 : 495.3 M
전국에 10 여점 만이 남아있어 지적사적 측면에서 매우 귀중항 유물 입니다 .
▲ 청량당입니다 . 수어장대 들어가는 입구 좌측에 있으며 , 맞은편에는 360년된 향나무가 있습니다 .
청량당 과 매바위 = 이 사당은 남한산성을 쌓을때 동남쪽 축성의 책임자였던 이회장군과 그의 넉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였습니다 . 이회는 공사비를 횡령했다는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했고 , 이 소식을 들은 부인송씨는 한강에 몸을던저 따라죽었읍니다 .
이회는 죽을때 자신의 죄가 없으면 매한마리가 날아올 것이라 예언을 했는데 , 과연 매한마리가 날아와 그의 죽음을 지켜보았습니다 . 후에 누명이 벗겨지고 ,그가 맡은 공사가 가장잘된것으로 알려지자 사당을지어 초상을 안치하고 넉을 기립니다 .
서장대가 있는 산 이름이 청량산이라 청량당이라고 부릅니다 .
청량당 앞에 있는 향나무 수령 360년 입니다 .
▲ 서장대 자리로 장군대라고도 부릅니다 . 수어장대 바로앞에 있으며 장군대 바로뒤에 청량산 (482.6) 삼각점이 위치합니다 .
♨ "서장대 자리" 는 11.04.13일 수정 합니다 = 장군대는 지형상 이곳일 것이라는 선입관이(성벽을 끼고 있을 것이라는 단견이) , 이곳을 서장대 자리라고 오판 했습니 다 . 보통 장군대 와 옹성 앞에는 지휘대가 옹치의 형태로 설치되여 있습을 봅니다 .
남,북장대에는 옹치가 있으나 동, 서장대에는 옹치가 없음은 지형상 옹치가 필요 없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 기록 된대로 서장대 자리는 현 수어장대 자리로 수정 합니다 . ♨
▲ 제6 암문으로 서암문(♨10.07.27일 수정보완합니다 .서암문이 아니라 "서장대암문"이였으나 현재는 수어 장대 암문이라고 불러야 할듯♨) 입니다 . 현 장군대 바로밑에 위치합니다 .
본성에 설치된 11개의 암문외측 개구부는 대부분 홍예식(무지개모양)이지만 장경사신지옹성 출입구로 된 제2암문과 제6암문만 평거식으로 ("--")되여 있습니다 .
인조15년 (1637)1월23일 한밤중에 습격해온 청병을 크게 물리친 곳이라하여 이 암문 부근을 "서암문 파적지" 라고 부릅니다 .
암문은 적의관측이 어려운곳에 설치하는 , 일종의 비밀통로 입니다 .
남한산성에는 총16개의 암문이 있습니다 . 그중 11개는 본성에 있으며 외성에는 봉암성에 4개 한봉성에 1개가 있습니다 .
용도는 다양하지만 , 비밀 내왕통로 와 은밀한 물자수송 옹성보호및 이용통로로 설치 되였습니다 .
암문에 붙친 번호는 공원 관리번호이며 , 장경사 암문을 1번으로 시계반대방향으로 붙쳐집니다 .
▲ 160년된 느티나무 옆 나무계단을 따라 내려갑니다 .
잠시내려가고 , 다시 돌계단을 오르면
▲ 영춘정 8 각정입니다 . (서문1 K ) (수어장대0.4 K ) (남문,지화문 0.7 K )
원 위치는 남문아래 있던것을 이곳에 복원하였으며 , 봄을 맞이한다는 의미입니다 .
최적지에 자리잡았으며 경기일원과 남 에서 불어오는 봄바람을 제일 빨리 느낄수 있는 곳입니다 .
조망이 좋고 서울시내 일대도 바라봅니다 .
▲ 영춘정에서 바라본 애련의탑 뒤로 멀리 검단산(신남성)도 바라봅니다 .
돌계단을 따라 다시내려가면 ,
▲ 안부쯤에 수십년된 소나무 , 높은소나무 가지위에 다른종의 소나무가 자라고 있습니다 .
보기드문 처음보는 식생입니다 .
다시 돌계단을 따라 능선을 오르면 ,
▲ 소능선위에 언제인가 (약2-3년전) 돌탑이 생겼습니다 .
약3 년전 돌탑 약1 M 앞에 , 예쁜 꽃나무가 심어저 있었습니다 . 정성이 담긴 작은 꽃나무 였습니다 .
하나 왕래가 많은 이곳에서는 살아남기 힘든 지경이였습니다 . 어느날 작은 나무로 수종이 변경되고 끝내는 - 돌탑으로 바뀌는것을 봅니다 .
애절한 사연이 있으리라 짐작하여 나는 이돌탑을 애련의탑 이라 부릅니다.
▲ 애련의탑에서 바라본 - 남문에서 성따라 오르는길 성끝으로 보이는곳(중앙은 제2남옹성)제1 남옹성입니다 .
옹성은 검단산(신남성)방향으로 돌출해 있으며, 지형상 신남성과 성남일대를 감시하는 옹성이 됩니다 .
전략상 중요한 지점이 됩니다 .
돌계단과 급한 나무계단을 내려가면 , 소나무숲을 지나 남문을 만납니다 .
▲ 남문 지화문. 입니다 .
▲ 남한산성 에는 동 서 남 북에 4개의 문이 있는데, 그중 가장크고 웅장한 중심문으로 현재에도 출입이 가장많은 곳입니다 .
인조2년 (1624)수축되기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 정조3년(1779)성곽을 보수할때 개축하고 지화문이라 합니다 .
1976년 문루를 복원하였고 2009 년 정조의 글씨를 집자하여 전면에 현판을 설치 하였습니다 .
병자호란 으로 인조가 처음 남한산성에 들어올때 이문을 통하여 들어옵니다 .
▲ 남문거리표 . 수어장대 1 K 는 1.1 K 로 기록합니다 . 남장대터는 1.1 K
( 여기서 수어장대 가는길은 우회길 과 성곽 따라가는 길로 나뉩니다 .)
▲ 남문 앞에서 볼수 있습니다 .
정원 반대편에도 많이 있습니다 . 대단한 공력 입니다 .
▲ 남문루 위에서 내려다본 성 밖의 모습입니다 . 성남으로 가는 여러갈래 길이 있습니다 .
남문에서 제1남옹성 오르는길 돌계단길로 경사도가 있습니다 .
남문부터 소나무는 드물고 잡목으로 수림이 형성됩니다 .
▲ 성내부에서 본 제1남옹성 옹치입니다 . 형식적인 옹치의 형태를 보이며 제1남옹성 에대한 지휘대의
역활을 합니다 . 하지만 지형상 으로 형식적인 옹치에 불과 한것은 , 옹성 첨예부분에 있는 8 개의
포대 바로 뒤에 별도의 지휘대가 있음을 볼수 있습니다 .
▲ 제1남옹성치 에서 바라본 , 제1남옹성 입니다 . 전략적 요충지 입니다 .
이 옹성에서 신남성(검단산)과 성남일대를 관찰합니다 .
▲ 제1남옹성 암문 거리표시. (남문 0.4 K ) (검단산 1.5 K ) (동문 1.3 k ) (남장터 0.7 K는 무시합니다 .)
▲ 제7 암문 으로 제1 남옹성 출입문입니다 .
이암문은 동서방향으로가던 성벽이 남북방향으로 바뀌는 지점에 위치하며 ,개구부는 서쪽을 향하고 있으며 홍예식 암문입니다 .
이처럼 성벽의 방향을 바꾸어 암문을 설치한것은 지형의 단점을 보완한 설치로 생각됩니다 .
또한 이암문은 제1남옹성과 신남성(검단산) 으로 연결되는 통로로서 남쪽으로 설치된 암문중에서는 가장 이용이 많았을것으로 보입니다 .
남한산성에 있는 5개의 옹성중 규모가 제일크고 중요한 요충지라 생각됩니다 .
또한 포대가 있는 옹성출입 암문은 보통의 암문보다 크게 축조되였음을 봅니다 .
암문 밖으로 이어진 제1남옹성은 둘레가 426 m 로 옹성중에서는 제일크며 , 특이한 점은 높게 지휘대를 설치하고 지휘대앞에 ㄷ자의 형태로 8기의 포대를 설치하였읍니다 . 포대는 남쪽방향 신남성을 향해서 3포, 동쪽방향 검북리 계곡과 제2,3옹성 방어용3 포 , 서쪽방향 성남은행동 방향 2 포대로 구축되여 있습니다 .
본성내에 있는 5개의 옹성은 - 서북을 탐지하는 연주봉 옹성 포대설치 (포대2기는 최근 보수과정에서 확인됨) , 동쪽 한봉을 탐지하고 방어하는 장경사신지 옹성 포대설치 , 그리고 남쪽 신남성과 성남과 검북리일대를 방어하는 제1,2,3, 남옹성 포대설치. 이며 ,
예외로 옹성의 형태가 아닌 여장밑과 성벽 사이에 2구의 포구가 한군데 설치 되여있습니다 .
위치는 송암정터와 장경사 중간지점 솟아 있는 성벽이며 한봉과 제일 가까이 마주보는 위치 입니다 .
그리고 외성인 봉암성에 1개의 봉암성 옹성이 있으며, 한봉성을 향하여 2개의 포대가 구축되여 있습니다 .
▲ 제7암문 옆에있는 검단산(신남성) 공군 통신대로 통하는 길문입니다 .
정체불명의 문으로 군시설물 이동통로로 생겨난 문입니다 .
(전에는 담파매표소가 있엇던 곳으로 없어저야할 문입니다 )
▲ 남장대터 가기직전 에 있는, 제8 남옹성 암문으로 제2 남옹성 출입 통로 입니다 .
현재발굴 완료후 복원 하려는 중입니다 . 잠시후에 볼수 있읍니다 .
▲ 남장대 터 거리표시. (남문0.5 K ) (동문1.1 K ) (공원사무소1.5 K )
뒤로 남장대 터 가보입니다 . 현재는 주춧돌만 남아 있습니다 .
남장대터 해설 .
▲ 제2 남옹성치
치는 성벽의 일부를 밖으로 돌출시켜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입체적으로 공격할수 있도록 한 시설물 중의 하나로 남한산성 본성에는 모두 5개의 치가 설치되여 있으며 , 외성인 봉암성 옹성 앞에 1개와 한봉성 지휘대앞에 1개가 설치되여 있음을 봅니다 .
위치는 남장대 바로앞에 있으며 남한산성에서 규모가 가장큰 성치로 중요한 위치에 설치되였습니다 . 바로 앞에 검단산이 보입니다 .
▣ (봉암성과 한봉성에 각1개씩의 치 외에 , 본성에 있는 5개의 치는 남옹성에 3 개와 연주봉 옹성치,
그 리고 북장대터 앞에 1개가 있으며 , 규모가 제일큰 제2남옹성 옹치 외에는 작은규모로 형식적
인 치의 모양을 보이고 있습니다 . )
▲ 남장대 옹치를 옆에서 봅니다 .
▲ 남장대옹치 바로 앞에 있는 제2 남옹성 입니다 .
옹성은 일반적으로 성문을 보호하기 위하여 성문 밖으로 한겹의 성벽을 더 둘러쌓은 이중의 성벽을 말 합니다 .
그러나 남한산성 의 옹성은 요충지에대한 거점확보를 위해 성벽에 덧대어 설치한 시설물로서, 다른성에서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
본성안에 있는 5개의 옹성중 , 3개의 옹성이 산성남쪽에 (제1,2,3옹성) 설치 되였는데 완만한 지형을 보완하고 , 신남성 및 검복리 계곡으로부터의 공격을 효율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설치 되였습니다 .
제2 남옹성의 둘레는 318 M 이며 다른 옹성과는 달리 이중으로 되여 있는것이 특색 입니다 .
포대는 ㄷ자형으로 남쪽방향 신남성을 향하여 3포 , 동쪽방향 3포 , 서쪽방향 3포로 , 9 대포로 구축되였으며 , 좌 우 양쪽의 포대방향은 서로 견제용 으로도 이용된듯 합니다 .
▲ 제9 암문 입니다 . 제 2,3 남옹성을 연결하는 출입문으로 이용될수 있는 암문 입니다 . 옹성을 효율적으로 이용하기위한 통로입니다 .
▲ 제9 암문을 밖에서 봅니다 . 제3옹성으로 가는길은 경사가 급하고 길이 없습니다 .
▲ 제3 남옹성 앞에 있는 거리표시 입니다 . 남문 (0.9 K )과 동문(0.8 K ) 중간지점 을 조금 지나왔읍니다 .
▲ 제3 남옹성치의 모습을 뒤 돌아 봅니다 .
▲ 제3 남옹성 입니다 . 암문이 없음으로 기록 되였으나 제9,10 암문을 이용하지 않았는가 생각됩니다 .
옹성의 둘레는 125 M 이며 5개의 포대가 , ㄷ자형으로 전면에 3포 좌 우에 1포식 구축되였습니다 .
특이한것은 포신혈이 ㅗ자형으로(보통은 □자형) 되여 있습니다 .
제3 남옹성이 내려다 보이는 성벽에 작은 치가 설치되여 있음을 볼수 있습니다 .
▲ 제10 암문입니다 . 제3 남옹성 포대로가는 통로로 이용되였으리라 추측합니다 .
▲ 한흥사지(200 M ) 갈림길 거리표시. (남문 1.2 K ) (동문0.5 K )
한흥사지는 앞으로 발굴 예정 인지 포장으로 덥혀 있습니다 .
이곳부터 동문 까지 500 M 는 급경사 내리막길 입니다 .
▲ 동문으로 내려가는길 . 중간에 탑이 보입니다 . 나는무명의 탑이라고 부릅니다 . (내가 사연을 몰라서)
다수의 정성과 치성이 뫃여서 만들어진 탑들이 , 자연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위적인 힘에 의해서 무너지는 것을 종종 보게됩니다 .
자신의 종교만이 유일하다고 믿는 이기와 자만이 잘못 표출된 결과입니다 . 남이 잘되는것을 그냥 두고보지 못하는 비 인간적 행위입니다 .
하지만 , 마음을 바꾸면 이들도 모두 선량한 우리의 이웃입니다 . 그들을 이해하고 탑은 정성들여 다시 쌓으면 됩니다 .
이곳부터 다시 급경사 400 M 내리막 길이 이어집니다 . 북쪽 사면길로 200 M 는 아직까지도 얼어붙은 눈길입니다 .
동문을 바라보고 내려가는길 맞은편 , 망월사 오르는길 은 가을철 단풍이 절경을 이루는 곳입니다 .
▲ 동문이 보이고 , 뒤에 망월사가 보입니다 . 가을 단풍이 제일 아름다운 곳 입니다 .
▲ 제11 동암문 입니다 .
암문의폭은 2.86 M 이며 , 높이는 3.07 M , 길이는 5.6 M 로 규모가 큰 암문입 니다 . 필요에 의해서 크게 축성되였음을 봅니다 . .
바로 옆에 있는 동문(좌익문) 밖은 경사가 급해 계단으로 이루어저 있습니다 . 수래와 일반인의 출입은 이암문을 이용하였을 것으로 봅니다 .
문루만 없을뿐 성문의 역활을 하였을 것으로 봅니다 .
▲ 동암문을 밖에서 봅니다 . 앞 뒤다 윗부분이 홍예식 암문 입니다 .
조선말 천주교 박해때 회생당한 시신이 이암문을 통해 버려져 천주교인의 성지순례 장소이기도 합니다 .
▲ 시신이 나가고 버려져 시구문 이라고도 합니다 .
▲ 동문앞 도로 거리표시. (남문,지호문 1.7 k ) (지수당0.3 K ) (공원관리소0.6 K ) (망월사0.5 K)
거리( K )는 포장도로 길 거리입니다 .
▲ 수구문 입니다 .
해발 370~400 M 정도의 산 능선을 따라 축성된 산성은 지세가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아 대부분의 물이 이 수문을 통해 밖으로 흘러 나가고 있습니다 . 산성내 에는 80 개의 우물과 45개의 연못이 있을정도로 수원이 풍부 하였다고 전해집니다 .
남한산성 안의 모든 물은 (극히 일부를 빼고)이 수구문 과 옆 도로건너있는 수문을 통하여 외부로 흐르게 됩니다 . 그 외는 동암문 수구통으로 배출되는 물길과 지형따라 소량의 물을 빼는 십여개의 수구통 받이가 설치되여 있음을 봅니다 . 물론 지형에 따른 소형의 수구통은 수십여개를 볼수 있습니다 .
▲ 성안에서본 동문(좌익문)입니다 .
남문과 함께 가장많이 사용된 성문으로 조선 선조때 보수하였고 , 인조2년에(1624) 다시 건립 하였으며 , 정조3년(1779)성곽 개축시 함께 보수 하면서 행궁 좌측에 위치하여 좌익문이라 칭 합니다 .
계곡이 지나는 낮은지대에 축조 되였기 때문에 계단을 쌓고 그 위에 성문을 축조하여 우마차의 통행이 불가능하여 물자의 수송은 수구문 남쪽에 있는 동암문을 이용하였을 것으로 봅니다 . 동암문은 봉암성으로 통하는 동장대 암문과 함께 크게 축조 되였습니다 .
▲ 동문을 지나며 급경사 오르는 계단길 입니다 .
급한 계단길을 약 5-6분 오르면 송암정 터가 있습니다 .
▲ 송암정의 원위치는 동문아래 계곡옆에 있었습니다 . 송암정은 없어지고 성벽을 지탱하고 있는 큰 바위 위에 , 지금도 큰 고사목이 있습니다 .
황진이와 더불어 , 자신의 행동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자결한 기생을 생각해 봅니다 .
그리고 술취한 사나 이도 생각 합니다 .
▲ 송암정을 지나며 뒤 돌아봅니다 . 큰 바위에 송암정 고사목이 보입니다 .
▲ 송암정터를 지나서 뒤 돌아봅니다 . 중앙 계곡은 종로 가는길이고 좌측봉은 남장대 방향입니다 .
중앙 맨뒤쪽에 수어장대가 보이고 , 바로밑에 만해기념관이 보입니다 .
기념관 우측으로 행궁이 위치합니다 .
▲ 송암정 터에서 약 5분정도 오름길로 진행하면 , 3 - 4 M 의 언덕이 있고 고지위에 2 대의 포대가
구축되여 있습니다 . 옹성이 아닌 여장밑 성벽에 포구를 설치한곳은 이곳뿐 입니다 .
고지위에 올라 , 포구로 밖을 바라봅니다 .
▲ 포구로 바라본 한봉성 , 정상은 한봉(418)입니다 . 한봉성 을 겨냥한 포대 입니다 .
▲ 장경사 전경입니다 . 경내에는 수량이 풍부한 약수가 있습니다 .
산성에서 동문옆 수문으로 흐르는 물 외, 성밖으로 빠지는 비교적 큰 수구통이 이곳에 있습니다 .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
▲제1 장경사암문 안쪽 윗부분은 평거식으로 6 암문과 같으나 ,
▲ 밖에서보면 홍예식으로 되여 있고 , 한봉성에 있는 16 암문과 출입이 잦았을 것으로 추정 합니다 .
장마가 지면 수구문의 역활도 하였을 것으로 봅니다 .
▲ 장경사를 지나며 뒤 돌아봅니다 .
한봉성을 향한 2기의포대도 보이며(맨끝) , 제1 장경사 암문도 잘 보입니다 .
암문의 번호는 여기부터 붙쳐 집니다 . 수구통은 우측에 있습니다 .
성박우측에 있는 한봉성을 바라보며 급경사길을 올라갑니다 .
▲ 제2 암문 장경사 신지옹성 거리표. (동장대터0.4 K ) (북문,전승문1.8 K ) (동문, 좌익문1.1 K )
▲ 제2암문 . 장경사 신지옹성 출입 암문으로 윗부분이 평거식으로 폭1.3 M 높이1.42 m 이며 포대로 이용되는 암문보다는 적고 , 일반암문 보다는 약간 큽니다 .
또한 다른암문은 원성축조시 함께 만들어저 사전에 계획된 것인반면 , 이 암문은 장경사 신지옹성을 쌓으 면서 신축한 암문으로 보입니다 . 하여 이곳에는 유일하게 옹치가 없습니다 . 암문을 나가면 ,
▲ 장경사 신지옹성 입니다 .
옹성의 둘레는 159 M 이며 , 끝부분에 2 대의 포대가 설치 되였고 한봉성 과 아래의 계곡을 향하고
있습니다 . 한봉성의 적을 방어하는 옹성으로 보입니다 .
옹성의입구 좌측에 확인되지 아니한 암문자리인듯 터진곳이 있고 한봉성에 있는 제16암문과 제일
가까운 거리에 있습니다 .
이곳에서 동장대 오르는 길도 급경사 길 입니다 .
▲ 동장대 오르기전 , 뒤돌아 장경사 신지옹성 을 봅니다 . 옹성 좌측으로 한봉이 보입니다 .
▲ 동장대터 올라가기 즉전에 있는 군포지 입니다 .
군포지는 성을 지키기위한 초소 건물 입니다 .
중정남한지(1848) 에 의하면 산성에는 125개소의 군포가 있었다하나 , 현재는 한군대도 남아 있지
않고 발굴된 3곳의 지역에는 모조석을 설치하여 위치를 보존하고 있습니다 .
▲ 동장대 터 입니다 .
외성인 봉암성과 한봉성도 관장하는 장군대로 생각 됩니다 . 이곳에도 서장대와 함께 옹치가 없습니다
▲ 동장대는 수어청에 소속된 5 영중 좌영장을 지휘하는 곳입니다 . 동장대는 인조2년(1624)산성 수축시에 설치되였고, 누각도 함께 건립 되였으나 , 지금은 터만 남아 있습니다 . .
다시 축성하지 아니한것은 한봉성과 연주봉성의 축성으로 군사적인 실효성이 없어졌기 때문으로 추정 됩니다 .
▲ 여장이란 성위에 낮게 쌓은 담으로 , 이곳에 몸을 숨겨 적을 향해 효과적으로 총이나 활을 쏠수 있게 만든 시설입니다 .
이곳 산성의 여장은 전돌로 축조한 평여장으로 , 하부는 석재로 상부는 전돌을 사용하였습니다 .
1개의 여장에는 중앙에 근총안과 좌우에 원총안 2개등 3개의 총안과(성박의 지형에 따른 예외도 있습니다 ) 여장과 여장의 사이에는 활을 쏘기 위한 타구가 마련되여 있고 , 여장의 규모는 길이 4.2 M , 높이1.3 M ,폭 0.8 M 내외가 일반적입니다 .
지형에 따라 계단식으로 1개의 총안으로 된곳과 경사지게 조성된 곳도 볼수 있습니다 . 이곳에만 일부 원형이 보존되여 있습니다 .
▲ 제3 암문 . 동장대 암문 거리표 . (벌봉,한봉성0.5 K ) (북문,승전문1.4 K ) (동문 좌익문1.5 K )
▲ 제3 암문 . 동장대 암문입니다 .
한봉성과 봉암성으로 나가는 암문으로 암문중에서는 제일큰 암문 입니다 .
이 암문은 본성과 봉암성 ,한봉성을 , 연결하는 암문으로 윗부분은 앞 뒤가 홍예문 입니다 .
높이는 2.65 M , 폭은 2.36 M, 로 문루만 없을뿐 성문의 역활을 하였으리라 봅니다 .
본성의 거의 약 3 분의1정도의 길이나 되는 외성의 둘레는 2.7 K 많은 장비와 병력이 이용하는 통로입니다 . 외성은 복원되지는 않았으나 성곽외 암문 과 포대도 있음을 봅니다 .
▣ 오늘 산행에는 포함되지 아니하지만 , 외성을 잠시 둘러 본다면
제3 암문. 동장대 암문 밖에서 뒤 돌아봅니다 .
제12 봉암성 암문 .봉암성과 한봉성 으로 통하는 암문입니다 .
봉암성의 중요성을 설명합니다 .
봉암성 방향에서 바라본 동장대 터 와 제12봉암성 암문 입니다 .
▣ 봉암성 입구에서 뒤돌아 , 본성내로 들어옵니다 .
다시 동장대 성안으로 들어와 성을 따라 진행하면, 약300개의 급경사 돌계단을 만납니다 .
성내에서 는 제일 경사도가 심한 지점 입니다 .
▲ 급경사 내리막 300개의 돌 계단 입니다 . 아직도 눈과 얼음이 있어 위험합니다 .
▲ 제2 군포지 입니다 . 군포지 뒷쪽에 작은 수문이(동문수문과, 장경사 수통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있는장소입니다 .
이보다 작은 수구통은 몇개가 더 있습니다 . 좌측으로 제4 암문 일부가 보입니다 .
▲ 안 에서본 제4 암문. 북암문 입니다 . (북암문 이지만 동장대 터가 더 가까이 있습니다 .)
북문의 보조기능으로 설치된 이 암문은 , 외부와는 제일 지근거리에 있는 암문으로 1 K 정도 내려가면
하남시 상사창동 입니다 .
북암문 성밖에서 뒤 돌아 급경사길을 봅니다 .
다시 성안으로 들어옵니다 . 북암문에서 잠시 좌측 성내로 약150 m 내려가면 ,
옥정사 터가 있습니다 . 옥정사 터는 성곽에서 약간 떨어저 있으나 (산성 일주코스에서 제외된 ) 식수가 있어 소개 합니다 .
동장대지에서 동문 가는길 우회로에 위치 합니다 .
옥정사터 뒤에 있는 맷돌 입니다 . 약6 년전에는 맷돌의 웃돌도 있었읍니다만 , 부피가 작다보니 도굴된 것으로 추정 됩니다 .
맷돌앞 , 제법큰 보리수 나무아래 옥정사 식수가 있습니다 .
▲ 다시 제4 암문으로 뒤 돌아가 (왕복0.3 K ) 잠시 진행하면 , 공들여 쌓은 소망탑이 있습니다 . 이탑도 한번 수난을 당한적이 있습니다 .
안타까운 일입니다 . 탑을 쌓을때의 정성도 보고 공수부대 비행단 방향에 또하나의 탑을 쌓는것도 보았습니다 . 정성들여 좋은 탑을 쌓는 분 - 부디 득불 하십시요 .
▲ 수난을 당한 탑의 상부모습 입니다 . 자비의 마음으로 용서합니다 .
▲ 옥정사 지를 지나는 우회길과 , 제4 암문 성따라가는 길목 만나는 지점에 있는 거라표시 입니다 .
▲ 소망의 탑을 지나서 동문 , 서문 , 수어장대 로 이어지는 능선을 봅니다 .
성따라 성안의 나무는 잘 가꾸어진 소나무숲 입니다 .
남한산성 안에 있는 소나무는 , 해방과 한국전쟁의 혼란기에서도 마을에 사는 산림계 회원님들이 힘을 합쳐 지켜낸 결과 지금과 같은 소나무숲을 볼수 있다 합니다 . 산림계 회원님들께 경의를 표 합니다 .
▲ 제1군포터 . 세번째 보는 군포터 입니다 .
▲ 북문 전승문. 13시43분 56초
북문 거리표. (종로0.4 K ) (서문,우익문1.1 K ) (수어장대1.7 K ) (상사창동3.5 K )
▲ 전승문의 설명 .
전승문을 지나며 약간의 오름길 입니다 .
▲ 북장대터 거리표. (서문,우익문0.5 K ) (수어장대1.1 K ) (동문,전승문0.3 K ) (동장대터1.6 K)
▲북장대터 설명문 .
북장대터 앞 성곽에 옹성치가 설치되여 있으나 형식에 불과합니다 .
▲ 성안에서 본 북장대터 옹치 입니다 .
▲ 북문에서 400 M 올라온 지점에 있는 거리표 .
▲ 장경사 주변에서 보이는 소나무 지대는 - 동장대를 지나며 군락을 이루고 , 계속 이어집니다 .
▲ 하남시 고골 과 풍산동 단지를 봅니다 .
▲ 연주봉 옹성도 바라봅니다 . 현재 수리중입니다 .
▲ 제5 연주봉 암문 과 연주봉 옹성은 현재 보수중 입니다 . 연주봉 옹성치의 모습 입니다 .
▲ 연주봉옹성
이 옹성은 북서쪽의 요충지인 연주봉을 확보하기 위하여 설치하였습니다 .
연주봉에서 바라보면 , 아차산북쪽과 남양주일대의 한강이 조망되고 , 하남시 춘궁리일대가 잘 보이며 ,
성 내부의 지역도 관측되는 중요한 요충지 입니다 .
근래의 발굴 조사결과 - 옹성 끝에서 포대로 추정되는 유구가 확인되어 고증을 통하여 포대를 복원 하기로 합니다 .
연주봉 옹성의 둘레는 315 M 이고 , 전투시에 성내로 출입할수 있도록 옹성과 본성이 만나는 위치에 암문(제5 연주봉암문) 을 설치 합니다 .
▲ 보수중인 연주봉 옹성. 2 대의 포대가 확인 옹성과 함께 복원된다 합니다 . 기대합니다
보수중인 제5 암문을 지나 잠시가면 매탄터 입니다 .
▲ 매탄터 설명 .
▲ 매탄터 앞 전망대 성위에서본 서울시내 전경 . 최고의 전망대 위치입니다 .
▲ 서문 우익문에 원 위치합니다 . 산성 일주 산행 끝납니다 .
거리 8 K , 서문출발 - 산성일주 (12.10분01초 - 14.01분31초) =1.51분 소요 됩니다 .
보통은 1.3-40분 정도 소요 됩니다 ( 1.10분 - 1.40분 ) . 2시간 잡으면 여유 롭습니다 .
▲ 서문 하산길 입니다 . 직진 합니다 .
하산길은 내려가며, 삼거리 분기점에서는 우측으로 갑니다 .
▲ 내려가는 하산길 , 일요일 수많은 인파로 우회로를 이용합니다 .
어쩔수 없이 조금 빠른 80%의 속보로 하산 합니다 .
▲ 유일천 갈림길 삼거리 통과합니다 . (세번째 분기점에서 좌측으로 진행하였습니다 .)
▲ 산불감시초소 , 화장실 삼거리 입니다 .
▲ 만남의광장 산행종료 합니다 .
총 거리 = 12 K . 출발 11시24분13초 - 도착 14시29 분05 초 = 총 소요시간 3시.05분 .
▲ 셀프사진 입니다 .
남한산성은 산성중 제일 아름다운 산성입니다 . ( 외성 답사기록은 다음기회에 )
▣ 후기 1 ,
산성을 일주한후 서문에서 - 북문을 지나 성안의 중심인 (1.3 K ) 종로 에서 다시 400 M 을 동문 쪽으로 내려가면 산성 역사관 이 있습니다 . 더 많은 자료를 보고 현장을 학습 할수도 있습니다 .
종로 로타리 주변에는 먹을거리와 마실거리도 푸짐합니다 .
▣ 후기 2 ,
남한산성은 2003 년12월23일 첫 산행을 시작한후 현재까지 매일산행을 하는 곳입니다 . 내가 산행 입문을 한 곳입니다 .
서문 및 수어장대 매일산행은 1.800회 이상 ,
산성 일주산행은 160회 이상 은 하였습니다 . (기록장을 정산하면 정확한 횟수가 확인 됩니다 )
또한 앞으로도 , 매일산행은 년250 회 이상 . 산성일주 산행은 년 50 회이상 . 신이 허락하는 날까지 다니기로 합니다 .
lsm37 산행인 . 감사 합니다 .



벌봉이 빠졌는데, 여기도 남한산성 일부로 보아야 마땅하지 않은지요.
또한 역사적, 전략적 가치가 높다고 하던데요.
정말 부지런하십니다.





변함없는 건강으로 더 좋은 산행이 계속되시기를 바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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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답사 백운에서 복사. (2011,08.06일자)
***남한산성(南漢山城)***
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남한산성(南漢山城)은 경기도 광주시, 성남시, 하남시에 걸쳐 남한산에 있는 산성으로, 행정주소 상으로는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다. 병자호란 때 인조가 청나라에 대항했던 곳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1950년대에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공원화된 후 현재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많은 시민들이 찾는 장소가 되었다.
남한산성은 한강과 더불어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한때 백제의 수도 하남위례성으로 추정되기도 했던 남한산성은 백제의 시조 온조가 세운 성으로 알려졌으나, 신라 시대에 쌓은 주장성이라는 설도 있다. 이곳에서는 백제의 토기·와편(瓦片)이 발견되었다. 조선 시대에 숙종과 인조때에 각종 시설물을 세우고 성을 증축하여 오늘날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직전인 1907년에 일본군에 의해 숱한 건물이 파괴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1963년 1월 21일 남한산성의 성벽이 국가 사적 제57호로 지정되었고, 1971년 3월 17일 남한산성은 경기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제 158호), 5년 후인 1976년 7월 1일 관리사무소가 개소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지금은 주변 시민들에게 훌륭한 휴식처이자, 건강을 위한 등산 산책 코스로도 인기를 얻고 있다.
1.성의 역사
▶조선 시대 이전
백제 시조 온조가 남한산성과 관련된 것은, 조선 초기 백제의 첫 번째 수도 “하남위례성”이 남한산성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餘地勝覽), 《대동야승》(大東野乘), 《연려실기술》, 《여지도서》(輿地圖書), 《대동지지》 등 대부분의 조선시대 지리 관련 자료는 남한산성이 백제의 고성이라고 주장했다. 한성으로 막 도읍을 옮긴 조선의 입장에서 한성이 국가의 수도로 적합한 곳임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의 저자인 홍경모만이 유형원의 《반계수록》을 인용하며 이런 주장을 반박하였으나 인정받지 못했다. 참고로, 오늘날 학계에서는 최초의 백제 수도인 위례성으로 송파구에 있는 풍납토성을 강력하게 지목하고 있으며, 계속 연구 중이다.
남한산성의 최초 축성에 대해서 두 번째 설은 신라 시대에 쌓은 주장성이라는 주장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근거한 것인데, 삼국사기에 주장성이 한강 이남의 “한산에 주장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4,360보이다.”라는 기록되어 있고, 한강 유역을 둘러싸고 고구려, 백제와 치열한 전쟁 중이던 신라가 한강 이남에 대규모 성을 쌓을 필요 또한 충분했기 때문이다. 당시 한산 지역 산성 중에서 이 기록에 근접한 산성은 남한산성이 유일하다. 또 조선 시대 기록에도 주장성의 길이가 3,993보[1]나 17,400척[2]등으로 기록되어 있는 거리를 오늘날 단위로 환산하여 계산하면 주장성에 관한 기록은 비슷하다. 인조 당시 개축할 때 기록에는 “옛 터를 따라 남한산성을 다시 쌓게 하였다.”라는 기록이 주장성이 남한산성이라는 설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고려 시대에는 특별한 기록은 없다. 다만, 몽고의 고려 침입 당시 1231년과 1232년 두 번 광주성에서 몽고군을 물리쳤다는 기록이 있는데(당시 광주부사 이세화의 묘지 비석), 광주 지역에 소재하는 산성은 이성산성과 남한산성이지만, 6세기 중엽 축성된 이성산성은 규모가 작아 농성전용이라기보다 해미읍성처럼 행정 중심지의 성격이 강해 위의 기록에 나오는 광주성을 남한산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앞서 언급된 이세화의 묘지명에는 몽고군이 침공했을때 성을 수리했다고 되어 있으며, 《고려사》에 공민왕 10년에 홍건적이 침공했을때 공민왕이 개경을 포기하고 피난길에 오르자 광주 주변 백성들이 모두 산성으로 올라갔다는 기록이 고려 시대 기록이 전부다. 다만, (남한산성이 고려 시대 기록에 나오는 광주성이라는 전제 하에) 기록 자료나 발굴된 고려 시대 유물이 적은 점을 들어 전쟁 상황에서 일시적으로 사용하는 농성전용 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조선 시대
전략 거점으로서 남한산성의 중요성은 조선 태종 때 본격화되었다. 1401년 요동을 다녀온 이자영의 보고에 의거, 명나라가 조선을 침략할 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고조되자 태종은 국경과 내륙을 막론하고 고을 별로 산성을 쌓고 기존의 산성을 개축하여 산성 중심의 방어체제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남한산성도 이러한 국방정책에 따라 세종 때에 군사시설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아직 태종 때부터 세종 때까지 남한산성이 개축되었다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으나,《세종실록지리지》에서 남한산성에 대해 비교적 상세하게 현황을 파악한 기록이 있는데, 이 기록은 남한산성을 이용하기 위해 현황을 파악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따라서 이를 통해 당시 개축이나 수리는 안했어도 군사기지로 이용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중인 1596년에 서애 유성룡이 남한산성을 전략적 거점으로 삼을 것을 주장했고, 1603년(선조 36년)에 다시 제기되기도 하였으나, 실제 남한산성이 정비되기 시작한 것은 1621년(광해군 13년)에 석성으로 개축 공사를 시작하면서부터다. 이때 일부 수축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광해군은 완성을 보지 못하고 폐위되었으며, 남한산성이 본격적으로 지금과 같은 형태로 증축된 것은 인조 대에 이르러서다. 일단 인조는 광해군이 못다한 것을 이어받아 1624년부터 1626년까지 2년간 공사를 추진하여, 공사 완료 후 광주목이 남한산성으로 이전했고, 수어청도 같은 해에 남한산성에 설치되었다. 성의 둘레도 6,927보가 되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한산성은 1636년 병자호란의 치욕을 피할 수 없었다. 인조와 조선군은 이곳에서 농성을 시작했지만, 결국 45일 만에 식량 부족으로 성문을 열고 나가 항복했던 것이다. 호란 후 봉암외성(峰巖外城)·포루·돈대·옹성 등을 증축하였고, 문루(門樓)와 장대(將臺)를 축조하였다. 성내에는 숭렬전(崇烈殿)·연무관·침과정(枕戈亭)이 있다.
조선 말, 남한산성은 의병 활동사에 다시 등장했다. 1896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미사변) 후 봉기한 의병들 중 경기 의병이 이천 의병들과 연합하여 남한산성을 점거하였다(2월 28일). 이후 한성 진공을 준비했으나, 관군에 체포된 김귀성이란 자가 관군에 남한산성 성벽 서쪽에 파손된 부분이 있음을 밀고했다. 관군은 이 파손된 부분으로 밀고 들어와 의병을 해산시키고 성을 장악했다.
1907년 군대 해산 후, 일본은 당시 조선군의 무기와 탄약을 인수했는데, 남한산성 내 사찰에 보관 중이던 무기와 탄약도 회수하여 폭발시켰다.
▶일제 강점기
1919년 3월 27일, 남한산성에서 인근의 중부면 단대리·탄리·수진리 주민 300여 명이 만세운동을 하기도 했으며, 1930년대에는 항일민족운동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1930년 석혜환, 정영배 등이 조직한 남한산노동공조회를 남한산성을 중심지로 활동을 시작했으나 1936년 일제에 의해 괴멸되었다. 1930년대 한국독립운동은 사회주의 계열이 두각을 나타냈는데, 이 조직도 마찬가지였으며, 해방 후에도 인근 사회주의/공산주의 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해방 후 현재
남한산성도 한국전쟁은 피할 수 없어 성벽과 성내의 건물들이 파괴되거나 훼손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남한산성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했으나, 4·19 혁명 후에 수립된 제2공화국은 이를 무효화시켰다. 1971년 도립공원으로 재지정되었고, 복원사업이 1975년부터 시작되어 1997년까지 성벽 5.1Km를 복원했다. 현재 성남시와 광주시 양 방향으로 남한산성을 관통하는 도로는 1974년에 완공되었다.
현재는 옛 풍파를 간직한 채 서울특별시 및 경기도 등지 시민들의 자연 휴양처가 되고 있다.
2.성의 자연환경
남한산성의 전반적인 지형은 청량산(497m)을 중심으로 급경사로 된 화강편마암의 융기 준평원으로서, 주봉인 청량산(497.9m)을 중심으로 북쪽의 연주봉(467.6m), 동쪽의 망월봉(502m)과 벌봉(515m), 남쪽으로 몇 개의 봉우리를 연결하여 쌓은 성이다. 그래서 남한산성의 성벽 바깥은 급경사지만, 성 안은 경사가 완만하고, 화강편마암의 융기 준평원으로 넓은 구릉성 분지다. 결코 완만하지 않은 산 자체의 경사가 성벽과 결합하여 단단한 자연 방어선을 이루는 관계로 공격자의 입장에서는 까마득할 뿐이다.
게다가 사시사철 물이 마르지 않아 장기간 농성에 유리하다. 하지만 분지 내에는 고산지대인 관계로 하천은 미약하고, 산성천이 유일한 하천으로 침식곡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산정의 급경사면에 비해 북부 산록에는 경사가 하부로 갈수록 완만한 산록 완사면이 발달하고 있다.
연평균 기온은 인접 지역과는 고도 차이로 인해 약 4도 정도 낮은 기온차가 나며, 연평균 강수량은 1,300mm∼1,400mm이며 맑은 날의 평균 일수는 약 204일로 봄과 늦가을에 맑은 날이 많다. 산간 지역의 계절 변화는 평지보다 1∼2주 늦게 봄이 오고 일찍 겨울이 온다.
3.성의 시설 및 건축물
▶동문
가장 사용빈도가 많았던 문으로, 성의 남동쪽에 위치했다. 다른 이름으로는 좌익문(左翼門)이라 하였는데, 이는 전라우수영처럼 왕이 남쪽을 바라보며 통치하므로 이 기준으로 봤을때 동쪽은 왼쪽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폭은 3.1m, 높이는 4m로서 홍예기석 위에 9개의 홍예돌을 쌓은 홍예식 성문으로, 지면이 성문보다 낮아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안쪽에는 가로 31cm, 세로 16cm의 철린으로 보강했다. 성문 위의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서문
산성 북동쪽에 있는 문으로 다른 이름으로는 우익문(右翼門)이라 했다. 광나루나 송파나루에서 가장 가깝지만, 경사가 급하여 당시 물자를 수송하던 우마차 등은 이 문으로 드나들기는 힘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문의 폭은 1.46m이고, 높이는 2.1m다. 동문처럼 홍예식으로, 장방형 홍예기석 위에 5 매의 홍예석을 올려놓았다. 안쪽에는 2짝의 목재 판문을 설치하였다.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1칸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인조가 세자 등과 함께 청나라에 항복하러 갈때, 이 문을 지났다고 한다.
▶남문
남문은 성의 서남쪽에 있는 문이다. 남문은 정조 3년(1779년)에 성곽을 개보수할 때 개축하여 지화문(至和門)으로 불렀다. 또 남무은 4대문 중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있다. 다른 문들처럼 문루와 홍예문으로 나뉜다. 남문의 홍예문은 높이 4.75m, 폭 3.35m, 길이 8.60m로 홍예기석 위에 홍예석 17개로 구성되어 있다.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3칸이며 동문보다 기둥높이는 낮으나 건물의 전체 높이는 조금 높다. 현재의 문루는 1976년에 복원한 것이다.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처음 남한산성에 들어 올 때에도 이 문을 통해서 들어 왔다.
▶북문
남한산성 북문은 성곽 북쪽의 해발 365m 지점에 있으며 전승문(戰勝門)이라고 한다. 북문을 나서면 계곡으로 난 길을 따라 상사창리로 이르게 되는데 조선시대에 수은으로 옮긴 세곡을 등짐으로 이 문을 통해 산성 안으로 운반하였다. 선조대의 기록을 보면 산성 내에 동면과 남문, 수구문의 3개의 문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북문은 1624년에 신축된 성문이라고 생각된다.
1779년 성곽을 개보수할 때 개축하고 이름을 붙여 전승문이라 칭하였다. '전승문'이란 싸움에 패하지 않고 모두 승리한다는 뜻인데 현재 편액을 걸려있다 않다. 북문은 홍예식 문이며, 홍예기석 위에 10개의 홍예돌을 쌓아 구축하였다.
▶성곽
성곽은 기본적으로 원성과 외성으로 구분하는데, 원성은 하나로 연결된 본성이며, 외성으로 동쪽에 봉암성과 한봉성, 남쪽에 신남성이 있으며, 동·서 두 개의 돈대가 구축되어 있다. 원성은 1624년(인조 2년) ~ 1626년 (인조 4년) 사이에 개/증축 당시 축성되어 둘레 7,545m다. 원성 내부는 대략 67만여평으로 측량되었다. 현재 원성은 남쪽과 북쪽 일부가 훼손된 상태다.
▶장대
흔히 "수어장대"란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는데, 본래 장대는 전투시 지휘가 용이한 지점에 설치한 지휘소다. 현대의 달리 장군이 직접 전장을 관찰하며 지휘했던 당시에 장대(지휘소)는 성내에서 가장 높고, 지휘와 관측이 용이한 곳에 설치하였다. 보통 한국의 성에서 장대는 단층 형태가 주류이나, 남한산성은 2층 누각형태다. 이와 같은 형태는 경기도 수원시의 수원 화성에서도 확인된다. 남한산성은 넓어서 총 5개의 장대를 설치했는데, 18세기 중엽에 모두 붕괴했다. 18세기 중후반에 서장대와 남장대를 2층 누각형태로 다시 세웠지만, 현재 남은 것은 서장대다. "수어장대"란 이름은 이 서장대를 가리킨다.
▶옹성
주 성곽에서 바깥으로 길게 뻗은 작은 성곽이다. 성벽에 달라붙은 적군을 옆에서 공격하기도 하고, 남한산성의 경우 돌출된 옹성에서 봉화대 역할도 겸한 것으로 추정된다.
*남한산성[ 南漢山城 ]-네이트 백과사전
이곳은 백제 초기의 유적이 많이 분포되어 있고, 일찍부터 온조왕대(溫祚王代)의 성으로도 알려져 왔다. 신라 문무왕 13년(673)에 한산주(漢山州)에 주장성(晝長城, 일명 日長城)을 쌓았는데, 둘레가 4,360보로서 현재 남한산성이 위치한 곳이라고 믿어져 내려온다.
고려시대의 기록에는 보이지 않으나 ≪세종실록≫ 지리지에 일장산성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둘레가 3,993보이고, 성안에는 군자고(軍資庫)가 있고 우물이 7개인데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또한 성안에 논과 밭이 124결(結)이나 되었다고 하였다.
남한산성이 현재의 모습으로 대대적인 개수를 본 것은 후금(後金)의 위협이 고조되고 이괄(李适)의 난을 겪고 난 1624년(인조 2)이다. 인조는 총융사(摠戎使) 이서(李曙)에게 축성할 것을 명하여 2년 뒤에 둘레 6,297보, 여장(女墻 : 성 위에 낮게 쌓은 담) 1,897개, 옹성(甕城 : 성문의 앞을 가리어 적으로부터 방어하는 작은 성) 3개, 성랑(城廊 : 성 위에 세운 누각) 115개, 문 4개, 암문(暗門 : 누각이 없이 적에게 보이지 않는 곳에 만든 작은 성문) 16개, 우물 80개, 샘 45개 등을 만들고 광주읍의 치소(治所)를 산성 내로 옮겼다.
이 때의 공사에는 각성(覺性)을 도총섭(都摠攝)으로 삼아 팔도의 승군을 동원하였고, 승군의 사역과 보호를 위하여 장경사(長慶寺)를 비롯한 7개의 사찰이 새로 건립되었으나 장경사만이 현존한다. 그 뒤 순조 때에 이르기까지 각종의 시설이 정비되어, 우리 나라 산성 가운데 시설을 완비한 곳으로 손꼽히고 있다.
처음 축성의 목적을 대변해 주듯이 유사시 임금이 거처할 행궁(行宮)이 73칸반, 하궐(下闕)이 154칸이었다. 궁실에 따른 건물로는 1688년(숙종 14)에 좌덕당(左德堂)을 세우고, 1711년에 종묘를 봉안하기 위하여 좌전(左殿)을 세웠다.
남문 안에는 사직을 옮길 우실(右室)이 있다. 1798년(정조 22) 한남루(漢南樓)를 세우고 1624년에 세운 객관(客館)인 인화관(人和館)을 1829년(순조 29)에 수리하였다.
남한산성의 수어(守禦)는 처음에 총융청(摠戎廳)이 맡았다가 성이 완성되면서 수어청이 따로 설치되었다. 수어청에는 전·좌·중·우·후의 5관(五管)이 소속되었는데, 전영장(前營將)은 남장대(南將臺), 중영장은 북장대, 후영장은 동장대, 우영장은 서장대에 각각 진을 치게 되었고, 좌영장은 동장대에 머물렀다.
그러나 강화가 함락되었다는 소식과 최명길(崔鳴吉) 등 주화파(主和派)의 주장에 따라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수항단(三田渡受降壇)으로 나가 치욕적인 굴욕을 당하고 말았다.
*남한산성(南漢山城) -예술지식 백과
남한산성은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산성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산성으로서 <광주군지>에는 8km 정도라고 기술되어 있으며 1:5,000 지형도를 기본으로 한 GIS측정 결과 산성의 둘레는 옹성을 포함하여 10,841.5m로 확인되었다. <남한지>에서는 성벽 안 둘레는 6,290보로 17리 반이고, 바깥 둘레는 7,295보로 20리 95보이며, 성가퀴는 1,940타이고, 5옹성과, 16개의 암문, 125개소의 군포, 4개소의 장대가 있다고 하였다.
그중 원성은 대부분 인조 2년(1624)부터 인조 4년(1626)까지 축성된 것으로 전체 둘레는 7,545m이고, 성 내부의 면적은 2,216,637㎡(643,307평)이다.
북한산성과 함께 도성(都城)을 지키던 서울남부의 산성으로써 지금은 동·서·남문루와 장대(將臺)·돈대(墩臺)·암문(暗門)·우물·보(堡)·누(壘) 등의 방어시설과 관해(官力 : 관청), 군사훈련시설 등이 남아 있다.
대외적으로는 후금의 위협이 커지고 대내적으로는 이괄(李适)의 난 등으로 어려웠던 조선 인조대에 남한산성은 현재의 모습으로 대대적인 개수를 하였다. 이 때의 공사는 각성(覺性)을 도총섭(都摠攝)으로 삼아 팔도의 승군을 동원하여 진행되었다. 승군의 사역과 보호를 위하여 장경사(長慶寺)를 비롯한 7개의 사찰이 새로 건립되었으나 현존하는 사찰은 장경사뿐이다. 그 뒤 순조 때에 이르기까지 각종의 시설이 정비되었다.
이후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인조가 이곳으로 피란하였는데, 이 때 수어사인 이시백(李時白)은 서성을, 총융대장 이서는 북성, 호위대장(扈衛大將) 구굉(具宏)은 남성, 도감대장(都監大將) 신경진(申景所)은 동성 망월대, 원두표(元斗杓)는 북문을 지켰다. 그러나 강화가 함락되었다는 소식과 최명길(崔鳴吉) 등 주화파(主和派)의 주장에 따라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수항단(三田渡受降壇)으로 나가 치욕적인 굴욕을 당하고 말았다.
처음 축성 목적을 대변해 주듯이 유사시 임금이 거처할 행궁(行宮)이 73칸반, 하궐(下闕)이 154칸이었다. 궁실에 따른 건물로는 1688년(숙종 14)에 좌덕당(左德堂)을 세우고, 1711년에 종묘를 봉안하기 위하여 좌전(左殿)을 세웠다. 남문 안에는 사직을 옮길 우실(右室)이 있다. 관해로는 좌승당(坐勝堂)·일장각(日長閣)·수어청(守禦廳)·제승헌(制勝軒)을 비롯하여, 비장청(裨將廳)·교련관청(敎鍊官廳)·기패관청(旗牌官廳) 등의 군사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또한 종각(鐘閣)·마구(馬俓)·뇌옥(牢獄)·온조왕묘(溫祚王廟)·성황당(城隍堂)·여단(羈壇) 등이 이루어졌고, 승도청(僧徒廳)을 두어 승군을 총관하였다.
남한산성의 수어(守禦)는 처음에 총융청(摠戎廳)이 맡았으나 성이 완성되면서 수어청을 따로 설치하여 이를 담당하게 하였다. 수어청에는 전·좌·중·우·후의 5관(五管)이 소속되었는데, 전영장(前營將)은 남장대(南將臺), 중영장은 북장대, 후영장은 동장대, 우영장은 서장대에 각각 진을 치게 되었고, 좌영장은 동장대에 머물렀다. 이중 현존하는 것은 4장대 가운데 서장대뿐이다. 이 밖에도 성내에는 현절사(顯節祠)· 연무관(演武館)· 지수당(池水堂)· 영월정(迎月亭)· 침과정(枕戈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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