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13.10.31(목) - 11.3 (일) = 가족산행 제16차 = 경주 유적,불국사,석굴암,토함산 산행 .

lsm37 산행인 2013. 11. 15. 18:55

누구와 : 아내와 둘 이서 ,

산행지 : 경주유적 , 불국사 , 석굴암 , 토함산 산행으로  마무리 한다 .

산행거리 :

소요시간 :

날   씨 :

기   타 : * 어머니묘소 이장문제 와 가족들도 만나고 토함산 산행도 곁들인다 .

            * 자연히 며칠간의 여행이 된다 .

 

 

아내는 차멀미를 하여 고속버스를 이용 할수없다 . 고속철을 타면 갈아타고 경주에서 시간이 바뿌다 .

중앙선을 타고 남는 시간은 경주시내 관광을 하기로 한다 . 오랫만에 함께하는여행이 된다 .

경주역에 도착한다 .

 

경주역 대합실에서 아내와 함께찍은 셀프사진이다 .

 

경주시는 어둠속에 잠들어 있다 .

24시 영업점에 가보니 아내가 먹을 음식이 없다 . 할수없이 24시 편의점에서 간식으로 해결하고 ,,,,,

 

가족들과 만나기로한 터미널  확인하고 , 시내관광시간이다 .

어렸을때 는 수학여행 , 성인때 는 관광으로 경주에 오면 항상 일정에 따라 대충대충 들러보며 지나간다 .

오늘은 시간이 많다 . 여유있게 경주를 탐방 하고자 한다 . 둘이서 단 둘이서 말이다 .

집을 나서면 가족애는 슬며시 살아난다 .

 

여기는 대릉원(大陵苑) 후문으로 입장한다 .

삼국사기에  "미추왕은 재위 23년만에 대릉에 장사지냈다 " 는 기록이 있어 미추왕릉이 있는 이곳을 대릉원 이라한다 . 대릉원에는 천마총 , 황남대총 등 23여기의 능이 밀집해 있다 .

경주에서 발굴된 금관총 , 서봉총 , 금령총 , 아직도 발굴되않은 무덤들도 많다 . 

 

 

뒤에 보이는 무덤이 황남대총 이다 .

두개의 무덤이 붙어있는 표형분으로 전체 길이가 남북120 m , 동서길이 80 m , 높이 23 m 의 경주에서

가장큰 쌍무덤 부부무덤 이다 . 쌍무덤은 남쪽에는 남자가 북쪽에는 여자의 무덤으로 밝혀졌다 .

 

황남대총 바로옆에  천마총 이 있다 .

이 무덤에서 "자작나무로 만든 말다래에 그려진 천마도" 가 나와 ,

이무덤을 천마총 이라 부르며 , 신라시대의 대표적인 돌무지 덧널무덤 이다 .

밑둘레 157 m , 높이12.7 m 의 비교적 큰무덤 으로 5 - 6 세기에 축조된  어느 왕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

 

구조는 평지위에 나무널과 부장품(껴묻거리)을 놓고 , 그바깥에 나무로짠 목곽(덧널)을 설치하여 ,

돌덩이를 쌓고 흙으로 덮었다 . 발굴당시 유물 11.500여점이 출토되었다 . 

 

출토된 주요 유물은 복제품으로 만들어 전시하고 , 무덤의 내부구조를 볼수 있도록 하였다 .  

 

천마총 . 자작나무로 만든 말다래에 그려진 천마도 , 총은 이름을 알수없는 큰무덤을 이른다 .

천마총 내부 탐방한다 .

 

내부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 있다 . 전부 머리속에 넣고 나온다 . 머리가 무거워 진다 .

 

묘의 주인을 모를때 ,

* 총 = 특이한 유물 특별한 형태를 이루는 무덤 .

* 분 = 특징없는 평범한 무덤 .

 

묘지의 주인을 알때 ,

* 능 =  임금이나 왕비의 무덤 .

* 원 =  왕세자 , 세자빈 , 임금님의 부모 로 왕위에 오르지 못한 무덤 .

 

* 묘 = 일반무덤 ,

 

아내의 표정은 덤덤하다 .

 

빨간 열매를 바라보는 아내 .

 

한바퀴 돌아보기로 한다 .

 

황남대총 크기도 하다 .  

 

대능원 을 한바퀴 돌고  황남대총 으로 돌아왔다 . 하지만 미추왕릉 은 아직은 보지 못했다 .

 

대릉원 후문 앞 길건너 법장사 절 . 절 뒷뜰에도 고분군이 있다 .

아직도 3시간의 여유가 있다 .

 

다시 한번  황남대총 을 배경으로 ,,,,,

 

미추왕릉은 포장도로 약50 m 거리에 있다 .

 

정문으로 나온다 .

 

옛 신라의 왕도거리 . 어마어마한 규모임을 알수 있다 .

금관총에서 출토한 왕관과 허리띠 금제장식 유물들 , 천마도 , 옥충 장식 말안장 . 그리고 설화를 설명한다.

 

대능원 정문앞에서 폼을 잡는 아내 .

바로 옆에 신라문화 체험관이 있어 방문한다 .

 

경주의 대표적인 석굴암 모형도 . 실제 석굴암에서 내부를 자세히 볼수있는 시간도  촬영도 못한다 .

여기서 찬찬히 보아두는것이 도움된다 .

 

감실불상 . 이실물이 어데 있는지 보지 못했다 .

 

포석정 . 신라왕실에서 제사를 지내던 곳이라 한다 .

옛모습은 거의 없고  유상곡수연 자리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띠워 연회를 하던 6 m 의 수구만이 남아있다 .

신라의 마지막 경애왕이 견훤에게 최후를 맞은 곳이라 한다 .

 

포석정은 제사를 지내는 신성한곳 , 연회를 베풀며 유흥을 즐기는곳 , 천년의 왕도가 무너지는 망국의 곳 .

세월은 변하며 역사를 만들고  역사는 반복한다 .

 

서악고분군 .

 

 

괘릉 . 외동읍 괘릉리에 있는 ,

5 세기 신라 제38대 원성왕의 능으로 신라능묘 중 가장 완비된 능묘로 보존되여 있다 . 

능의 규모는 작으나 능둘레 호석에는 12지 신장이 새겨져 있고 봉분앞 입구에는 서역인의 얼굴모습을  한 

무인석(武人石)이 있어 눈길을 끈다 . 당시 이국인들과의  활발한 교류가 있었음을 볼수 있다 . 

 

가면을 쓴 아내의 모습을 보며 ,

사실로 이어가는 역사도 , 내면의 기록은 가면을 쓰기도 하며 , 사실의 역사로 기록된다 .

그리고 우리들은 그 역사를 배우고 있다 . 인간이 가면을 쓰는한 진실은 왜곡 될수도 있다 .

 

실물을 보며 설명하기로 한다 .  

 

실물로 보며 설명한다 , 

 

전시된 다보탑 과 석굴암 을 감상하는 아내 .

 

전시장에서 따끈한 차한잔을 마시며 , 여유있는 탐방을 한다 . 자신의 모습을 뒤돌아 보면서 ,,,,,

 

금령총에서 발굴된 " 도제 기마 인물상" (국보제 91호 . 모형)이다 .

(이 기마인물상 은 신분이 있는 상인데 반하여 , 서민상이 서울 경복궁역사에 모형이 전시되여 있어)

비교 하여 보기로 한다 .

 

 

서울 경복궁 역에 있는 " 기마인물형 토기"

하인으로 보이는  이 토기는 동시대의 양반으로 보이는 토기와 한쌍으로 출토되였다 한다 .

전 화면에 나온  신분이 있는 토기와의 연관성을 확인할수 없었다 .

숙제로 남아 다음기회에 풀어보기로 한다 .  이모형도 돌이 아닌 도기로 만들었으면 좋왔을텐데 ,

 

보물 제199호 . 남산신선암 마애보살상 . 이번에 실물을 보지 못햇다 .

 

신라 문화 체험관 입구에 있는 천마를 연상케 하는 천마들 , 장식이 없는 라마들이다 .

 

대릉원 정문앞 주차장 . 고분로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면  바로 ,,,,,

 

경주 동부 사적지대 (사적 제161호)를 우측으로 본다 .

이곳은 옛신라 왕경의 중심부로 , 월성 , 안압지 , 첨성대 , 계림 등 중요한 사적이 많을뿐 아니라 17대 내물왕능 을 비롯한 수십기의 고분군 들이 완전한 형태로 밀집되여 있는 곳이다 .

 

또한 이곳 지하에는 봉토가 없어진 많은 고분이 있을것으로 보며 ,

옛경주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

 

천년고도 다운 모습은 시내 곳곳에서 볼수 있다 . 바로 좌측에 첨성대가 보인다 .

 

첨성대는 동양에서 제일 오래된 , 별자리를 관측하는 천문대 로  1.300여년이 지난 오늘까지 원형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

 

1. 첨성대의 의미 .

옛 사람들 에게 별자리를 관측 하는일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

첫째 . 

왕은 하늘의 뜻을 받아 땅을 다스리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왕은 하늘의 자손임을 강조 했습니다 .

둘째 .

왕이 정치를 잘하고 못하는 것에 대해서 , 하늘이 자연 현상을 통해 평가를 내린다고 생각 했습니다 .

셋째 .

천체의 변화나 이상기후는 농경사회 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 

 

1. 첨성대의 위치 .

첨성대는 경주를 지켜주는 수호신인 남산과 왕궁을 잇는 직선위에 위치하며 천재지변과 별자리를 관측한 결과를 빨리 왕에게 알려야 했기 때문에 왕궁과 가까운 평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 

 

1. 첨성대의 구조 .

첨성대는 사각형의 28 , 29 단의 기단과   원추형으로 돌려 쌓은 모양은 천원지방   땅의 중심지 이며 ,

                                                      원추형으로 돌려 쌓은 27단은 선덕여왕 신라 27대 대왕을 상징하며 ,

첨성대에서 사용된 돌의 수 362개 반은 음력으로 1년의 의미 ,

남쪽으로 향한 창문 13 , 14 , 15 단은 단사이 , 춘 , 하 , 추 , 동 구분점 이며 ,

창문 아래 1 - 12 단과 , 창문위  16 - 27단 을 더하면 , 24절기를 나타내며 ,

맨위쪽 우물정자를 이루는 28 , 29 단의 방향은 동 , 서 , 남 , 북 을 표시 합니다 .

 

1. 첨성대의 비밀 .

12단 까지 채워저 있는 흙으로 인해  무너지는 위험을 감소 시키고 ,  외력과 기초부 등 침하 및 지진으로

                                                    인한 진동 등에 대비하여  원형을 보전 할수 있습니다 .

18 , 20단의 정자석은 21 - 23 단이 많이 구부러져 있어 21단 위의 무개를 받아

                                                    안쪽으로 무너지는 것을 방지 하고 있습니다 .

15 , 26 정자석은 다른 단에 비해 굵고 무거워  누루는 힘을 강하게 하고  균형을 유지하는 역활을 합니다 .

28 , 29 단의 외부 정자석은 27 단의 부재를 빠짐없이 누루며 전체를 강하게 눌러

                                                     첨성대의 지붕 역활을 하고 있습니다 .

                        

아내는 위의 내용들을 여러분께 설명하고 있습니다 . 무시기 알고나 하는지 ?

첨성대 (국보 제31호) .

신라 선덕여왕(632 - 647)때 만든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 관측대 이다 .

화강석으로 조성한 2중 기단위에 , 30cm높이의 돌 27단(8.1 m)의 석단을 원통형의 곡선으로 쌓아올리고 ,

그위에 장대석으로 우물정자 형으로 축조하여 , 정상부에서 천문을 살피도록 시설되여 있다 .

 

정남쪽의 석단에는 아래로 부터 , 제13단과 제15단(창문) 사이에 네모난 출입구를 두고 , 이 출입구 아랬부분 양쪽에는 사다리를 걸쳐 오르 내리며 내부로 통하도록 하였다 .

규모는 밑면의 지름이 5.17 m , 높이가 9.4 m 이며 지대석 한변의 길이는 5.35 m 이다 .

                                             높이가 9.4 m ( 1 - 27 단 8.1 m + 기단 , 정자석 1.3 m = 9.4 m)

직선과 곡선이 잘 어우러진 안정감 있는 건축물 이다 .

 

구조와 구성은 물론 , 돌 하나의 규격도 상징적 의미를 담고 ,

맨위 정자석의 길이가 기단부 길이의 꼭 절반인 점 등 과학적이며 신비함이 있는 건축물 이다 .

 

첨성대 의 해설을 끝내고 다음 탐방지로 이동 합니다 .

첨성대의 그림을 그리고 설명하면 , 나는 이해가 빨리 되겠지만 야외라 칠판을 준비하지 못했다 .

 

의미를 알고 , 내 외면의 모습들을 관찰하면 탐방은 더욱 즐거워 진다 . 

하지만 아내의 첨성대 해설은 부족한것이 많다 . 탐방의 흿수가 늘면 좀더 상세한 설명을 할수 있을까나 ?

 

부족한 점이 많음에 아내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 메뚜기 뒤에 몸을 살짝 숨긴다 .

첨성대를 지나 잠시가면 우측으로 월성이 있다 . 월성에서 좌측 7번도로를 건너 가면 안압지가 나온다 .

 

동궁 과 월지 . 동궁안에 월지가 있다 . 조선조 부터 안압지로 불린다 .

 

좀전에 지나온 월성 (해자) 동쪽 7번도로 건너 , 바로옆에 있는 동궁과 월지 안으로 들어 왔다 . 

철책안 빈 공간은 건물터 자리다 .

 

왼쪽을 둘러본다 . 모과 나무다 . 모과나무 뒤에도 건물터 이다 .

 

나라의 경사를 맞아 축하연을 거행했던 동궁으로 문무왕 때 지었다 .

 

월지(안압지) .

" 궁안에 못을 파고 가산을 만들고 화초를 심고 기이한 짐승들을 길렀다 " 라고 삼국사기(문무왕14년조)에 기록이 있으며 , 월지는 동서남북 약190 m 규모의 인공 연못으로 세월이 흘러 ,

폐허가된 연못에 기러기와 오리가 찾아들어 조선조때 부터 안압지라 불리게 되였다 .

 

1975년 발굴된 유물에 , 연못에 띄웠던 배를 포함해 많은 유물이 국립경주 박물관에 전시되여 있다 .

일부 복원된 건물에  월지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전시되 있다 .

 

안압지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본다 .

납석제품 류 .

 

토기 류 .

 

생활장식 류 .

 

주령구 (酒令具) .

주령구는 1975년 경주 안압지를 발굴하던중 연못바닥에서 발견된 ,

크기4.8 cm의 참나무로 만든 14면체 주사위와 유사한 놀이 기구이다 .

각면에는 다양한 벌칙이 적혀 있고 , 문구해석은 학자들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으며 오늘날의 "불복불" 혹은미션 수행 놀이와 유사한 놀이기구라 할수있다 . 

 

육각형 팔면의 벌칙 .                                                 정사각형 육면의벌칙 .

곡비즉진 = 옆사람과 팔뚝끼고 마시기(러브샷) .           금성작무 = 반주 없이 춤추기 .

농면공과 = 얼굴을 간지려도 가만히 있기 .                   중인타비 = 여러 사람이 코 때리기 .

임의청가 = 누구에게나 마음대로 노래청하기 .             음진대소 = 받은잔 다 마시고 크게 웃기 .  

월곡일경 = 달을보며 노래한곡 부르기 .                       삼잔일거 = 세잔을 한꺼번에 마시기 .                

공영시과 = 즉흥시 한수지어 읊기 .                             유범공과 = 다른 사람이 무슨짓을 해도 참기 . 

양잔즉방 = 연거푸 두잔 마시가 .                                자창자음 = 혼자 노래부르고 혼자 마시기 . 

추물막방 = 부끄러운것 내어놓기 .

자창괴래만 = 혼자 노래하고 소리지르기 .

 

주령구의 다양한 놀이 방식이  당시의 유흥놀이의 일면을 엿 볼수있다 . 물론 상류사회의 단면이지만 ,

 

금속용기 류 .

철제도구 류 .

 

불교조각품 .

보물 제1475호 . 금동삼존판불(아미타불 ? 석가불 ?) . 우측 위 금동불입상 .

                                                                                                우측 아래 (좌)사리공상 . (우)금동보주 .

경주 박물관에서 볼수 있습니다 .

 

일상용구 류 .

골각 공예품 .

 

목간 .

 

맵새 .

 

기와 .

 

귀면와 .

당시의 생활상을 엿볼수 있는 광범위한 유물들이 출토되였다 .

뻘속에 뭍혀있어 오래 보존되지 않앗나 생각됩니다 .

 

월지의 가을 풍광 .

 

유물 탐방을 마치고 ,,,,,

 

건물터도 둘러봅니다 .

 

안압지를 한바퀴 돌아보지는 못하고 , 일부만 돌아봅니다 .

 

경주 주요 관광지 거리표 . 자가용 으로 탐방을 하면 메모 할만 합니다 .

 

경주 동궁과 월지(안압지) . 사적 제18호 .

통일신라 시대 굴궐터의 하나로 ,

임해전을 비롯한 여러부속 건물들과 함께 태자가 거처하는 동궁(東宮)으로 사용되면서 ,

나라의 경사나 귀한손님을 맞이하는 장소로 사용되였다 .

 

삼국사기에 문무왕 14년 (674)에 궁안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

진기한 새와 기이한 짐승을 길렀다  라는 기록도 있고 19년(679)에는 동궁을 지었다 .

"경순왕 5년(931)에는 고려태조 왕건을 위하여 임해전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라는 기록도 있다 .

 

월지는 조선시대에 폐허가 된 이곳에 기러기와 오리가 날아들어 안압지 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

 

1975년준설을 겸한 발굴조사 에서 신라때 축조되였던 월지의 모습 대부분이 확인되였고 ,

동궁 건물터와 월지에서 출토된 문화재를 전시하고 있다 .

 

임해전은 별궁에 속해있는 건물이지만 비중이 큰것으로 보이며 ,

안압지는 신라원지를 대표하는 유적지이다 . 

 

안압지에서 7번도를 따라 남쪽으로 잠시가면 경주 박물관 이다 .

 

경주 박물관 . 차례를 기다려 입장한다 .

 

비석의 세부명칭 .

지대석 = 땅과 맞닿는 곳에 놓인돌 .

귀 부 = 거북모양 의 비석 받침돌 .

비 좌 = 비신을 꽃는부분 .

비 신 = 글씨를 새기는 부분 .

제 액 = 비석의 이름을 새기는 부분 .

이 수 = 용을 새기거나 장식을 한 머릿돌 .

*유적지에서 오래된 비석을 보며 궁금한 것이 많아 참고 하기로 한다 .

 

숭복사 쌍거북 비석받침 .  쌍거북 비석받침은 세개가 불굴되는데 ,

숭복사 쌍거북 받침은 ,

삼국유사 에 원성왕(785 - 798)의 능은 토함산 서쪽곡사(승복사)에 있으며 최치원(857 - ? )이 지은 바문이 있다는 기록으로 원성왕의 명복을 빌어주던 원찰로 알려지고 ,

 

배리에 있는 창림사터 받침은 ,

창림사는  시조 박혁거세(57 BCE - 4 CE)가 세운 신라최초의 궁궐터로 알려져 있으며 ,

 

경주 암곡동의 무장사는 태종 무열왕(654 - 661)이 삼국을 통일한뒤 병기를 숨곁다는 전설이 있는곳 으로 ,

신라왕실과 관련이 있다 .

 

받침대로 보아 비의 크기가 웅장하였음을 짐작케 하며 ,

광개토 대왕비 와 북한산 비봉에 있는 (진품은 박물관) 순수비가 생각납니다 .

 

성덕대왕신종 . 에밀래종 을 배경으로 ,,,,,

 

성덕대왕신종(에밀래종) 국보 제29호 .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가장큰 종으로 높이 3.75 m , 입지름 2.27 m ,두께 11 - 25 cm 이며 ,

무게는 삼국유사에 구리 12만근 으로 만들어 졌다는 기록에 따라 대략 20톤으로 추정해 왔으나 ,

1997년의 정밀측정에 의해 18.9톤으로 확인 되였습니다 .

 

신라33대  " 성덕대왕(702 - 737)신종 "은 대왕의 명복을 빌며  35대 경덕왕(742 - 765)이 만들지만 완성을 못하고 , 36대 혜공왕(765 - 780)이 771년12월14일에 완성 봉덕사에 봉안 되였으나 ,

봉덕사가 수해로 유실된후 봉덕사 땅속에 약700년 동안 묵혀 있은후 세조5년(1460)영묘사로 옮겨졌으나 ,  

종각이 화재로 소실된후 중종 초년(1506)에 경주 봉황대로 옮겨 1915년 까지 아침 , 정오 , 저녁과 삼경을

알리는 역활을 했습니다 .

 

현재는 1975년부터 국립경주 박물관에 봉안되여 있습니다 .

 

성덕대왕 신종 을 배경으로  아내의 모습 . 신종의 특징과 신비를 이야기 할듯 당찬 모습입니다 .

이곳도 聖德大王 神鍾 이 제대로 봉안되지 않은듯 , 모형이지만 격식은 갖추워 설치했으면 합니다 .

1 . 상단부 "음관" . 

     신종 상단부 용머리 뒤쪽에는 , 대통 모양의 관이 솟아 있는데 음관으로 불리는 이 부분이 종의 음질과

     음색을 좋게하는  음향학적 설계 입니다 . 

     이 음관은 아름다운 종소리를 내는  한국종에만 있고  중국종 , 일본종 에는 없습니다 .  

     종 내부에서 일어나는 진동은 안에서 서로 충돌 , 반사하며 잡음을 내는데   음관이 잡음을 뽑아내는 

     음향 필터 역활을 하고 있습니다 .

2 . "맥놀이" 현상 .

     종을 한번치면 "웅" "웅" "웅" 하고 종소리가 커졌다 작아졌다 를 되풀이 해서 울리는 현상을 "맥놀이"

     현상이라고 합니다 .

     종을 만들때 재질이나 두께가 균일 하지않고   완전한 대칭을 이루지 않은 결과   진동수의 미세한 차이

     로 발생하는 것이죠 .

3 . "명동" (鳴洞) .

     신라종 은 지상보다 조금위에 종을 달고 치는데 , 종구 바로 밑 바닥이 우묵히 패여 있어  공동명 의  

     역활을 하도록 되여 있습니다 . 

     이 명동 방법은 " 세계 다른나라 에서는 유례가 없는 " 신라종 의 특유한 시스팀으로 , 

     음관으로는  종 내부의  잡음을 빨아내고  명동은 공명진동 을 일으켜 ,

     종을 쳤을때 긴 여운을 남기는 것 입니다 . 

 

지금 설치된 종(모형 ?)을 보면  , 명동의 울림판이 보이지 않고 . 종을 괴여올려놓은 나무판이 흉합니다 .

 

12 지간 신장에 대한 설명은 추후 하겟습니다 .

 

다음의 유물들은 월지(안압지)에서 출토된

 소형배 전시품 .

 

집 처마 복원품 으로 맛배지붕 재현품 , 

 

 

보물 제1475호 금동삼존판불 . (주불이 아미타불 인가 석가불인가의 논란)

신라왕실 의 신앙원천은 아미타불 인가 ? 석가 불인가 ?

금동판 삼존불 좌상은 중앙에 주존불 이 있고 그 좌우에 보살이 모셔져 있습니다 ,

주존의 손 모양이 석가모니 가 최초로 설법을 행항때 맺었던 초전법륜인 (初轉法輸인)을 하고 있기 때문에

석가불로 보기도 합니다 .

 

 

그러나 중궁의 둔황석굴 벽화와 , 일본 호류지 벽화의 아미타 정토도에서 같은 형식의 불상이 나타나기 때문에 아미타불을 표현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

그리고 일본의 호류지 헌납보물에도 이와 비슷한 판불상이 있고 보살의 보관에는 화불(化佛)이 있어 ,

관세움 보살과 대세지 보살 을 협시로 하는 아미타불 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

이로 보아 전법륜인을 한 아미타상 존불이 7세기에서 8세기에 걸쳐 동아시아 에서 유행하고 있었으며 통일된 신라왕실에도 아미타 신앙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

 

통일신라 불교조각 .

7 - 10 세기초에 제작된 다양한 금동여래입상 과 판불 금동불상이 출토되었다 .

동궁(월지)에 승방전이 있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보아 승방전에 모셔졌던 것으로 짐작된다 .

 

월지에서 출토된 전시품 .

 

월지에서 출토된 전시품 .

 

주령구는 안압지에서 설명 .

 

불법의 수호자 . 사천왕(四天王) 팔부중(八部衆) .

*사천왕 = 지극히청정한 부처의 세계로 들어가려면 통과 하여야할 문이 있습니다 .

               눈을 부릅뜨고 갑옷에 칼이며 창을 들고  악귀를 밟고 있는  네명의 신장(神將)이 서 있는 천왕문

               혹은 사천왕문 입니다 .  바로 사천왕이 있는 세계 입니다 .

               부처님 , 부처님이 계신곳 , 부처님의 말씀을 세상의 악 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신장으로 ,

               사천왕 외에도 팔부중 , 금강역사 , 십이지신 (十二支神)등이 있습니다 .

 

 사천왕은 고대 인도에서 귀신무리의 왕이었다가 불교에 귀의하여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이 된 존재 로 ,

 불교의 세계인 수미산의 중간쯤  동 , 서 , 남 , 북에 상주 하는데 ,

 동쪽은 지국천왕 , 서쪽은 광목천왕 . 남쪽은 증장천왕 . 북쪽은 다문천왕 이 머물면서 불법을 수호한다고

 합니다 .  사천왕의 모습이나 지니고 있는 무기들은 일정하지 않습니다만 , 

 북쪽을 지키는 다문천왕 만은 항상 탑을 들고 있는것이 특징 입니다 . 

 

* 팔부중 역시 사천왕과 마찬가지로  위로는 불법을 수호하고 , 아래로는 대중을 교화 합니다 . 

 불교가 인도에서 서역을 거쳐 중국이나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과정에서 무장한 모습을 띠게 되었지만 ,

 그 자세나 기물(技物)등은 정형화 되지않고 지역의 특성에 맞게 표현 되였습니다 .

 

 팔부중은 두종류가 있는데 부처를 수호하는 불타 팔부중과 사천왕의 권속인 사천왕팔부중 으로 나뉩니다 .

 우리나라 에서는 주로 불타 팔부중이 조성되는데 ,

 바로 천(天), 용(龍), 야차(夜叉), 건달바, 아수라, 가루라, 긴나라, 마후라가, 등 입니다 .

 

탑이 부처를 의미하기 때문에 , 부처를 지켜주는 팔부중과 사천왕 금강역사등을 탑에 새겼던 것입니다 .

                  

경주 박물관을 배경으로 , 석가탑 과 아내 다보탑 .

 

석가탑은 불국사에서 설명 .

 

불국사에서 설명 .

 

다보탑을 배경으로 아내 .

 

불국사에서 설명할 다보탑에는 4마리의 사자가 한마리로 , 불국사에서 설명 .

 

석굴암에서 설명 .

 

석굴암 부조상 (복제품) .

석굴암 본존불 바로 뒤에 있는 십일면 관음보살 과 본존불 앞에 있는 보현보살 , 문수보살 , 석굴암 부조를 석고로 뜬 시기는 일제강점기인 1914년 해체 복원할 때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자료가 남아있지 않아단정할수는 없습니다 . 참고 하기위하여 ,,,,,

 

금강역사 상 . (경주 석굴암 출토 . 통일신라 751년 무렵)

 

십일면 관음보살 (복제품) . (경주 석굴암 출토 8세기경 )

 

천불소탑 . 경주 석굴암 출토 . (통일신라 751년 무렵)

 

석굴암 보현보살 (복제품) . (경주 석굴암 출토. 통일신라 751년 무렵)

 

신라의 불상 앞에서 , 아내 .

 

신라의 불교 .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가 한반도에 처음전래된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371 - 384)2년(372)에 ,

전진(前秦)에서 순도(順道)가 불상과 불경을 전하면서 부터 입니다 .

백제 에서는 침류왕(384 - 385)원년(384)동진에서온 마라난타 에 의해서 입니다 .

신라는 눌지왕(417 - 458)때 불교가 전래되기는 했으나 , 불교 공인은 법흥왕(514 - 540)14년(527)이차돈(527)의 순교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

 

신라의 불교 공인과정을 보면 왕권강화와 불교는 땔수없는 관계입니다 .

이 시기의 불교는 왕실불교 , 국가불교 , 나아가 호국불교 의 성격을 띠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

대표적인 호국사찰로 황룡사 9층 목탑은 주변의 9개 나라에서 조공을 받겠다는 신라인의 염원을 담아 조성한 탑입니다 .

7세기 중엽에는 자장(610 - 654)을 중심으로한 계율종이 성행하였으며 , 밀교 또한 유행하여 병을 고치는 기적을 일으키거나 외적을 물리치는 이적을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불교는 더욱 융성 하였습니다 . 

 

 

 

신라불교 조각 .

불상은 불교의 교리와 신앙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

우리나라의 불상은 불교가 전래된 4세기 후반 중국으로 부터 들어 왔으며 ,

6세기 들어서서 본격적으로  한국적 불상을 만들게 되였습니다 .

 

고구려 불상은 장건함과 절제된 양감을 잘 표현하였으며 ,

백제 불상은 정교함과 세련미를 보인다고 한다면 , 신라 불상은 소박한 것이 특징 입니다 .

 

8 세기에는 석굴암 불교 조각에서 볼수 있듯이 한국불교 조각사상 절정의 불상을 만들어 냈습니다 . 

9세기 부터는 중국영향을 벗어나 새로운 불상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 

 

신라 금관 .

1921년 금관총에서 최초로 금관이 발견된이래 , 모두 6개의 금관이 확인 되였습니다 .

 

부처 .

부처(佛陀) = 는 깨달은 자를 의미 합니다 .  부처는 여래(如來)라는 말이 있는데 ,

여래는 진리의 재현자 열반에 다다른 자 라는 뜻이 있습니다 .

 

석가모니불 = 석가모니는 2.500여년전 인도에서 왕자로 태어나 출가하여 수행을 통해 ,

                   보드가야의 보리수  밑에서 큰 깨달음(정각해탈)을 얻은 인물 .

 

비로자나불 = 부처가 설법한 진리가 태양빛 처럼 우주에 가득비치는 것을 형상화 한것이 비로자나

                    불입니다 .  

                    화엄신앙의 비로자나불 은 진리 그자체를 뜻하는 법신불(法身佛)이기 때문에 형상화 되기  

                   어려운 것이 였으나 7세기 무렵 중국에서 먼저 불상으로 만들어 졌습니다 .

                    신라인 들은 보관을 쓴 중국의 비로자나불의 모습대신 ,

                    여래의 모습에 지권인을 맺은 비로자나불 을 창안 하였답니다 .

 

아미타불 = 아미타불 은 모든 중생을 구제하여 극락정토에 가게하는 부처입니다 . 무한한 진리의 빛을 상징

                하여 무량광불로 불렸으며 , 도교의 불로장생 신앙과 결부되어 무량수불 이라고도 하였습니다 .

 

약사불 = 약사불은 모든 질병뿐만 아니라 무지의 병 까지도 고쳐주는 부처로서 대의왕불(大醫王佛)이라

             고도 불립니다 . 이 부처는 둥근 약단지를 들고 있어 쉽게 알아볼수 있습니다 .

 

불상의 명칭 .

광배 (光背) =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진리의빛"을 형상화 한것 으로 ,

                    머리 광배와 몸 광배로 나뉘며 , 둘을 합하여 "거신광" 이라 합니다 .

육계 (肉계) = 인도 사람들의 상투에서 유래된 것으로 부처님의 크고 높은 지혜를 상징합니다 .

백호 (白毫) = 경전에는 부처님의 눈섭 사이에서 빛을 내어 무량세계(無量世界)를 비친다는  희고 부드러운

                    털이 오른쪽으로 말려있다고 합니다 . 불상에서는 돌기로 새기거나 보석을 끼워넣었습니다 .

삼도 (三道) = 불상 목에 새겨진 세개의 주름을 말 합니다 . 삼도란 생사를 윤희하는 인과(因果)를 나타내며

                    번뇌道 , 업道 , 고道 , 를 의미합니다 . 불상 뿐 아니라 보살상 에도 표현되였습니다 .

법의 (法衣) = 부처가 입은 옷을 통칭합니다 . 내의(內衣) , 상의(裳)衣) , 겉옷인 대의(大衣)로 이루어저

                    있습니다 .

수인 (手印) = 불 보살이 자신이 깨달은 것을 표현하기 위해짓는  손모양으로 인도어로 무드라 합니다 .

대좌 (대좌) = 불상을 안치한 받침대인데 , 석가모니가 성도할때  보리수 아래에 앉았던 금강보좌에서 

                    유래 합니다 . 연꽃무늬 대좌가 보편적 입니다 . 

 

보살은 깨달음을 구(求)하는 사람이라는 뜻 .본래는 석가모니 성도 이전의 모습을 가리키는 말이 였으나 ,

점차 위로는 부처를 따르고  아래로는 중생을 이끌어 성불 하기에 힘쓰는 존재를 의미 합니다 .

 

미륵 보살 = 석가모니 에게서 미래에 성불 하리라는 약속을 받았으며 , 석가모니가 죽은후 56억7천만년

                  지난뒤  이세상에 내려와서  모든 중생들을 제도 한다고 합니다 . 

관세움 보살 = 줄여서 관음보살 이라고도 하는데 , 부처님의 자비심을 상징 합니다 . 

                    이 보살은 중생의 여망에 따라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발현) 구제하여 준다고 합니다 . 

다세지 보살 = "지혜의 빛" 으로 , 모든 중생의 어리석음 을 없애주는 힘을 지닌 보살입니다 . 

                     관음보살 과 함께 아미타 부처의 옆에서 보좌하는 보살입니다 . 

문수 보살 = 지혜를 상징하는 보살로 석가모니 의 교화를  돕기 위해 나타나는 보살입니다 . 

                 보현보살 과 함께  석가모니 부처의 협시보살입니다 . 

보현 보살 = 자비나 이치(理致)를 상징하는 보살로 , 모든 보살의 이법(理法)을  실천하여 중생을 교화하는 

                 역활을 합니다 . 중생의 수명을 연장 시켜주는 덕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 

지장 보살 = 지옥에서 고통받고 있는 중생까지도 구제 하겠다는 서원을 새운 보살입니다 .

                 지장보살 은 다른 보살상과 달리 민 머리의 스님 모습이거나 머리에 두건을 쓴 모습으로

                 많이  표현 되였습니다 .  

    

보살상의 명칭 . (석조 관음보살입상)

보관 (보冠) = 보살이 쓰는 관으로 화불(化佛)등이 새겨져 있습니다 .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여러 모습으로 바뀌어 나타 난다는 부처)

영락 (瓔珞) = 목이나 팔에 두르는 구술을 꿴 장신구 입니다 . 

천의 (天衣) = 하늘나라 에 사는  천인의 옷으로 , 보살상이나 천인상이 걸치는 숄 형태의 옷을 가리킵니다 .

계인 (契印) = 손에 물건을 든 수인을 말하는데 , 약사부처를 제외 하고는 대부분 보살 , 신장 , 나한상 들이

                    이 계인을 취 합니다 . 계인에 보이는 물건은 연꽃 , 법륜 , 여의주 , 불경 , 무기(武器)등 

                    다양 한데 , 관음보살 의 경우 정병(淨甁) 을 들고 있는것이 보통입니다 .

군의 (裙衣) = 보살이 입는 하의로 , 인도 남성의 하의로 치마에서 유래되었습니다 .

 

보살상 .

 

석조 약사불 입상 . 경주 남산 개선사터 출토 , 통일신라 9세기말 - 10세기초 .

이 불상은 1930년대 개선사터 에서 경주 박물관으로 옮겼다고 함 .

왼손에 둥근 단지를 쥐고 있는것으로 보아 약사불 임을 알수 있습니다 .

불상은 매우얕게 굴곡이전혀 표현되지 않은 신체등으로 미루어 일반백성이 조성한 불상으로추정합니다.

 

금동 약사불 입상 (金銅藥師佛立像) 국보 제28호 .

이 약사불 은 경주 소금강산 백률사에 있던 것인데 , 1930년에 박물관으로 옮겼다 .

소금강산 은 불교 공인과정 에서 순교한 이차돈의 머리가 날아갔다고 한 곳으로 , 신라 인들에게는 불교성지 가운데 하나 였습니다 . 

그런데 약 단지를 쥔 손이 없는데 , 조선고적도보 에 실린 자료에는  왼손에 약 단지를 들고 있어 약사불 로 

불립니다 . 

 

석조 관음보살 입상 . 경주 분황사 출토  통일신라 9 세기 .

분황사 에 있던 상으로 머리와 몸체가 떨어져 있던것을 붙였습니다 .

동그란 얼굴 , 감은듯 만듯한 눈 , 짧은코 , 좁은어깨 , 왜소한 신체 , 대좌에 새겨진 화려한 연꽃무늬 장식이

특징인데 , 보관에 화불이 새겨져 있고 , 정병(淨甁)을 들고 있어  관음보살 상 입니다 .

 

석조 미륵 삼존불 . 경주 남산 장창골 출토 신라634년 .

이 삼존불은 1924년 장창골 한 석실에서 발견되어 경주 박물관으로 옮겨 왔습니다 .

삼화령(三花嶺) 미륵 삼존불 이라고도 부릅니다 .

 

삼국유사에 선덕왕때 , 꿈에서 깬 생의가  꿈에서 표시한 땅을 파니 과연 돌미륵이 나와  삼화령 위에 놓고  선덕왕 3년 그곳에 절을 짓고 살았는데  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 요컨대 선덕여왕(632 - 647<634>) 3년 경주 남산 삼화령 생의사 라는 절에 있던 미륵불 이라는 것입니다 .

 

반가사유상 (半跏思惟像) .

국보 제78호 . 국보 제83호 . 실물은 경주 박물관에서도 볼수 없었습니다 . 국립박물관에 와 있습니다 .

이 외에도 많은 반가사유상이 있다 .

 

오른발을 왼쪽 무릅에 올리고 <반가 半跏> 오른손은 턱을 괸채 고요히 앉아 생각에 잠겨있는  상 은 ,

원래 석가모니 가 출가전 왕자 였을때 , 인생의 번뇌로 깊이 사색하는 젊은 싯다르타 를 나타낸 것입니다 .

그렇기 때문에 반가사유상 이 지닌 특색은 ,

사색하는 부처님의 깊고 맑은 정신적 아름다움 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   

 

반가사유상 은 그 발생이나 전개 과정에 있어서도  다른 불상과 는 구별 됩니다 .

앞을 바라보며 대중과 직접 관계를 갖기마련인 일반 불상과는 달리 , 

반가사유상 은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 깊이 사유하는 듯한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 

 

인도에서 다른 불보살과 거의 같은 때 발생한 반가사유상 은 여러상 의 협시 보살이 였습니다 . 

중국에서는 나무아래 에서 사유하는 모습의 태자사유상(太子思惟像) 으로 나타 났다가 , 

독립된 상태로 바뀌어 우리나라에 전해젔습니다 . 

 

우리나라 의 반가사유상 은 삼국시대 6 세기부터  약 100년 동안 집중적으로 조성 되였는데 ,

대부분 독립된 보살상 형식으로 만들어 졌습니다 . 

 

중국에는 높이 20 - 30cm의 흙이나 돌로 만든 예가 많은데 비해 , 

우리나라 에는 1 m 에 가까운  대형의 반가사유상 도 있으며 20 - 30cm의 소형 작품도 많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 신라지역 에서는 경주단석산 의 신선사 마애조상군 가운데에 반가사유상 이 있으며 ,

경북봉화 와 경주 송화산에서 머리와 상반신이 깨져 없어진 대형의 석조반가사유상 이 출토되어 , 

당시 신라에서 반가사유상 의 제작이 성행하였음을 알수 있습니다     

 

경주하면 황룡사 를 그냥 지나칠수 없어  잠시 곁눈질 합니다 .

황룡사터 는 박물관 북쪽 안압지 옆 동쪽에 있습니다 .

 

황룡사 모형도 .

진흥왕 (540 - 576)14년 (553)짓기 시작하여 선덕여왕(632 - 647)때인 645년에 완성된 황룡사는 ,

황룡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 절을 짖고 황룡사 라고 하였답니다 .

황룡사 에는 신라의 세 가지 보물중  두가지가 있었다 합니다 . 

하나는 진흥왕35년(574)금당에 안치한 "금동장륙존상" 과

또 하나는  선덕여왕 14년(645) 자장 (610 ? - 654)의 권유로 세운 구층목탑 입니다 .   

 

금동장륙존상 은 높이가 480 cm 로 현재 남아있는 신라 금동불중 가장큰 백륜사약사불 이 180 cm 정도인것에 비하면 , 당시 황룡사의 위세가 대단했음을 알수있다 .

 

9 층 목탑은 백제의 아비지를 초빙하여 나무와 돌로 탑을 만들게 하였는데 ,

그높이가 225척(약80 m )이 였다고 합니다 . 황룡사는 고려고종 (1213 - 1259) 25년(1238)몽고의 침입으로 모두 불타버리고 말았습니다 .

 

망새 (경주 황룡사터 출토) .

망새는 지붕 마루끝에 장식하는 기와로 ,

목조건물 에 화재의 예방책 으로 용의 상징물로  망새 장식을 하였습니다 . 

 

경주박물관 에 전시된 수많은 전시물중 , 내가 관심이 많은 일부의 부분만 탐방합니다 .

12.30분 터미널에서 만나기로한 시간을 염두에 두고 , 터미널에서 박물관 까지 온 코스로 되돌아 갑니다 .

 

신라초 왕의 명칭을 쓰기전 이사금 시대 , 

4대 석탈해왕 이후  5 대 파사왕 때 성을 쌓고 역대왕이 여기서 살았다 .  

 

경주 월성 (사적 제 16호)

신라시대의 궁궐터 , 지형이 초승달 처럼 생겼다 하여 신월성 또는 월성 임금이사는 성이라하여 재성으로도

불렸으며 조선시대 에는  반월성이라 불려 오늘에 이른다 .

 

신라 5대(이사금시대)파사왕 22년(101)에 여기에 성을 쌓고 옮긴 다음 , 역대왕들이 이 월성에 살았다 .

남문 , 북문 , 인화문 등과 동궁인 임해전 으로 통하는 임해문이 있었으며 ,

월성안에  현재 조선시대 얼음창고인 석빙고가 남아있다 .

 

남쪽으로는 남천이 흐르고 동쪽 , 북쪽 , 서쪽으로는 해자를 팠다 .

 

월성 입구 . 나무숲 뒤가 안압지 , 안압지 뒤에 황룡사터가 있다 . 물 웅댕이는 옛 해자 자리 .

월성은 사진에서 보듯 둔덕위에 나무가 있고 조선시대 때 사용한 석빙고가 있다 .

 

이곳의 석빙고 는 , 방실의 규모가 35.5 평으로 남한 지역에서는 최대규모 입니다 .

겨울에 얼음을 채취 여름까지 보관하며 , 먹기도 하고 , 음식물 보관 , 치료용 등으로 사용하였으며 ,

장빙법 과 관청을 두어 관리하였다 합니다 . 석빙고는 기체 대류 , 열전달율 , 태양열 복사등 을 이용한 과학적인 시설물 입니다 .

현재 남한에 경주, 안동, 창녕, 청도, 현풍,영산등 6개 , 북한 해주에 1개 총 7개가 남아있다 .

서울에는 얼마전 까지 서빙고 , 동빙고 , 가 있었지만 지금은 동내 이름으로 만 남아있다 .

 

반월성 주위에 아직도 남아있는 해자 .

반월성을 지나 오전에 탐방코스 를 따라 되돌아가면 , 대원릉을 거쳐 약속장소인 터미널로 간다 .

 

대원릉 안 . 미추왕릉 앞에있는 무지하게 큰 나무 . 아내는 적지 않은데  더 적어 보인다 .

 

13대 미추왕릉 . 사적 제175호 .

 

12.30분 가족들 과의 약속시간 이다 . 버스터미널 까지는 약10분 거리다 .

 좀 늦는다는 전갈을 받고  , 그 시간을 마춘다 . 

 

경주 시내 안내도 .터미널에서 .

 

오후 일정은 모친 산소에서 ,,,,,,

 

묘소 입구 .

오후 6시경 경주 보문단지 숙소에 간다 .

 

다음날 . 불국사 탐방 . 아내와 형수님 .

 

불국사(佛國寺) .  고적 제 502호 .

신라 경덕왕 10년(751)에 재상 김대성이 개창하고 혜공왕 10년(774)에 완성되었다 .

임진왜란 때 왜병에 의해 완전 소실되었다 .

 

그 후 대웅전 등 일부를 다시 세웠고 1969 - 1973년 처음의 모습으로 복원하여 지금에 이른다 .

동서 길이90여 M 되는 석축과 , 청운교 , 배운교 위에  자하문 , 대웅전 , 무설전 이 남북으로 놓였고 ,

석가탑 , 다보탑이 서 있다 .

그 서쪽에 연화교 , 칠보교 , 안양문 과 여래좌상 , 금동아미타불 을 모신 극락전이 있디 .

무설전 뒤편에는 금동 비로자나불 좌상 을 모신 , 비로전 과 관음전이 있다 .

 

불국사는 화려하고 장엄한 부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워 , 찬미하던 수도자 들이 불도를 닦던 곳이다 .

풍부한 상상력 과 예술적인 기량이 어우러진  신라 불교 미술의 정수로 ,

경내의 조형물 하나 하나가 뛰어난 조형미를 이루고 있으며 ,

법당과 탑이 서있는 기단위의 가람 자체가  불국을 상징하고 있다 .

 

1995년 석굴암과 더불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등재 되었다 .

 

셋째 형님내외 , 그리고 아내 .

 

불국의 나라로 들어가는 천왕문 .

 

사천왕상이 우리를 맞이 하고있다 .

좌측에 수미산 동쪽을 지키는 지국천왕 비파를 들고있다 .

우측에 수미산 남쪽을 지키는 증장천왕 보겸을 들고있다 .

 

좌측에 수미산 서쪽을 지키는 광목천왕 여의주를 들고있다 .

우측에 수미산 북쪽을 지키는 다문천왕 보탑을 들고있다 . 

이 천왕들은 인도의 토속 신앙 신들로 불도에 귀의하여 , 청정한 불법을 지키며 수호하는 신장들이다 .

 

나를 보고 우리가족 들을 경내로 안내한다 . 하지만 점잖게 사양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경내로 들어간다 .

 

천년의 고도 불국사에서 천년의 약수로  정결히 딱고 마신다 . 형님과 함께 ,.,,,,

 

자하문 이다 .

자하문으로 오르는길은  두개의 다리를 건너야 한다 . 다리라 함은 속세로부터 부처의 세게로 건너감을 상징하며 , 각기 45도 각으로 경사진 아래 다리계단은 18단으로 된 백운교 , 위쪽 다리계단은 16단으로된 청운교 , 두 다리를 이어주는 부분의 아래쪽은 무지개 모양의 홍예(무지개)로 되여있다 .

 

안양문 . 기록은 생략 합니다 .

 

현재 작성중 ,,,,,

 

 

 

 

 

운판 .

 

목어 .

 

다보탑 .

 

석가탑 해체 수리중 .

 

 

 

 

 

 

 

 

 

 

 

 

 

 

 

 

 

 

 

불국사 에서 ,

 

 

 

온 가족이 점심식사후 ,

이후 디카이상으로 사진이 없다 . 산행이 시작된다 . 석굴암에 오르고 , 토함산으로 간다 .

 

토함산 정상 에서 ,,,,,

 

00

 

토함산 정상에서 , 아내 약간은 지처있다 . 이사진은 아내의 스마트폰 사진이다 .

 

저녁 노을을 바라보며 , 동해 바다로 이동한다 .

 

동해 바닷가에서 ,,,,,식사후 경주역으로 이동 , 중앙선으로 귀경한다 .

 

다보탑

한국의 어떤 다른 석탑과도 닮지 않은 독특한 아름다움을 가진

높이 10.4m의 다보탑은

정사각형 기단 위에 여러 가지 정교하게

다듬은 석재를 목재 건축처럼 짜맞추었는데 복잡하고 화려한 장엄 미,

독특한 구조와 독창적인 표현법은 예술성이 매우 뛰어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답니다.

 

또 하나 안타까운 사실은

이 기단에는 원래 네 모퉁이에 돌사자를 배치하였으나,

일제 강점기에 없어지고 지금은 1구만 남아 있다고 합니다.